폴란드의 고속버스 중 하나인 폴스키 버스를 타려면
조금 독특한 승차 절차를 거쳐야 한다.
숫자와 알파벳이 포함된 20자가 넘는 예약번호를
버스기사님 본인이 갖고 있는 리스트의 예약번호와
꼼꼼하게 대조한 후에서야 버스에 오를 수 있다.
이삼십 명이 넘는 사람들을 모두 확인하기 때문에
지루함을 동반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이런 건 한국이 참 간편하고 신속하게 하는데'
'뭔가 이유가 있으니 이런 방식으로 하겠지'
'조금 천천히 진행될 뿐 큰 문제는 없으니까'
'예약번호를 종이에 적어온 사람들도 재미있네'
그저 내 얇고 단순한 생각들일 뿐이지만
어찌됐든 다른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 중 하나는 여행이다.
우리는 폴스키 버스를 타고 바르샤바를 벗어나
일주일에 한두 번씩 다른 도시로 여행을 떠났다.
'토룬'은 바르샤바에서 당일치기가 가능한 곳으로
1400년경에 번성했던 중세시대 상업도시이다.
사실 유럽에는 중세도시들이 흔한 편이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도시들도 꽤 많다.
토룬 역시 평범한 중세도시일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이곳에는 한 가지 색깔을 더해 주는 인물이 있다.
지동설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의 고향이 토룬이다.
토룬에는 코페르니쿠스의 생가를 비롯해서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느낄 수 있는 곳들이 있다.
나도 무려 돔 형태의 천체상영관에서
'내 친구 코페르니쿠스'라는 애니메이션을 보았다.
생강쿠키와 아이스크림도 매력적이고,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강아지 동상도 꼭 만져봐야 한다.
'자코파네'는 폴란드인들이 즐겨 찾는 휴양지다.
산과 물을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도시를 방문해야 한다.
비록 바르샤바에서 버스로 7시간이 걸리는 거리이지만.
특히 '모르스키에 오코' 호수는 단연 압권이다.
3시간의 하이킹으로 산을 오르면 이 호수를 볼 수 있는데,
고작 3시간으로 이 호수를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할 정도다.
5월의 따뜻한 햇살로
골짜기의 눈과 얼음이 녹은 물이
호수로 콸콸 흘러내리는 깨끗하고 시원한 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조용하면서도 편안하고 아름다운
폴란드의 이미지와도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아우슈비츠 역시 폴란드를 방문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사실 이 곳은 너무나 유명해서 많은 자료를 접한 탓에
수용소 곳곳의 모습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용된 유태인들의 비참한 생활공간과
생생하게 남아 있는 그들의 유품들을 직접 보게 되면
집단의 광기와 인간의 잔악함에 저절로 몸서리쳐진다.
아우슈비츠 옆에 있는 비르케나우 수용소는 더욱 크다.
어떤 집단을 대상으로 한 학살을 위해
이런 대규모의 시설을 지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다.
내가 이곳을 방문한 5월에는
수용소 부지가 온통 푸르른 들판이었음에도
차마 아름답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크라쿠프'는 폴란드 제2의 도시다.
사실 폴란드에서 한 달간 머물 도시를 결정할 때
바르샤바와 크라쿠프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했었다.
결국 우리는 바르샤바를 선택했고,
크라쿠프에는 이틀의 시간만을 투자했다.
차라리 크라쿠프가 별로였더라면
우리의 선택을 칭찬하며
기분 좋게 바르샤바로 돌아갔을 텐데,
아쉽게도 크라쿠프는 부족한 점을 찾기가 힘든 도시였다.
바르샤바 이전에 폴란드의 수도였던 곳인 만큼
역사적이고 고풍스러운 장소들이 넘쳐났고,
광장의 활기참 역시 바르샤바 못지않았다.
강 옆에 지어진 바벨성의 위치 선정도 기가 막혔다.
물론 우리가 한 달간 살았던 바르샤바는
폴란드의 그 어떤 도시보다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다만 크라쿠프 역시 매력이 넘치는 곳임이 분명하다.
바르샤바는 박물관 인심이 참 후한 곳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대부분 무료입장일로 지정해서
부담 없이 박물관들을 둘러볼 수 있게 해 놨다.
우리는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
쇼팽 박물관, 빌라노프 궁전 등을 무료로 관람했다.
무료입장이더라도 티켓을 주기 때문에
기념품으로 간직하기에도 좋다.
국가와 같은 어떤 공동체가
많은 돈을 들여 만들고 운영하는 박물관이라는 곳은
그 공동체가 추구했거나,
추구하는 가치관과 관련되어 있다.
어떤 공동체를 방문할 일이 있다면,
그 곳에 있는 박물관을 가보는 것도
그 공동체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된다.
자신이 박물관 스타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방문하는 곳에 어떤 박물관이 있는지를 찾아보는 것도
괜찮은 여행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한 달간 여행했던 폴란드는
우리에게 햇살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고,
소문내지 않고 조용히 품고 있는 자연을
아낌없이 보여 주었으며,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역사의 현장들을 제공해 주었다.
과거 공산권 국가에 대한
괜한 선입견과 두려움을 없애주기도 했다.
모두가 인간의 상식이 통하는 범위 내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딱딱할지도 모른다는 그 곳 사람들은
먼 곳에서 온 우리들을 어디서든 환대했다.
폴란드는 앞으로 몇 개월간 이어질
동유럽 여행을 위한 적응지이기도 했다.
나와 아내는 우리의 세 번째 여행지인
슬로바키아로 향했다.
-----------------------------------------
부족한 글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음번에 슬로바키아 1편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