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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세살이 Dec 12. 2018

공무원 그만두고 여행중인 30대의 성찰기, 세르비아편1

1년이 넘는 장기 여행을 하면서

한 도시에 한 달씩 머물기로 했던 이유는,

한 달 정도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로지 한 도시에서 한 달의 시간을 보낸다면

그 도시의 명소들뿐만 아니라

관광객들은 그냥 지나칠 숨겨진 장소들,

현지인들이 살아가는 방식,

그들의 신념이나 가치관 등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그런 듯도 했다.

시간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굵직한 관광 명소들 외에도

의미가 있는 장소들에 찾아가 볼 수 있었다.


현지인의 집에서 숙박하면서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구경하고,

종종 식사를 함께 하면서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분명히, 짧은 여행보다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경험할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긴 시간이었기 때문에

기존의 짧은 여행에서 느꼈었던 아쉬움도 덜했다.      


단지 며칠만을 한 도시에서 보내게 되면

그곳의 진짜 모습을 더 알고 싶다는

간절함이 들 때도 있는데,

장기 여행을 통해 그런 결핍을 해소할 수 있었다.


정말 그 도시에서 오래 살아온

현지인들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이곳을 잘 아는 사람 중의

한 명이 된 것 같은 기분 좋은 자부심도 들었다.      


하지만 내가 어떤 곳에서

한 달의 시간을 보냈다고 해서,

정말 그곳에 대해 잘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한 달은 정말 충분한 시간이었을까?



나와 아내는 세르비아의

노비사드(Novi Sad)라는 도시에서

한 달을 머물렀다.


유럽을 찾는 한국의 여행객들은

보통 세르비아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세르비아에 온다고 해도

수도인 베오그라드를 며칠 둘러보는 것이 보통이다.      


조금 여유가 된다면

베오그라드에서 기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이곳 노비사드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노비사드의 중심가와

강변의 요새 정도를 방문하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 정도만 둘러봐도

노비사드를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추억하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한 달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노비사드를 찾는 사람들의 우선순위에서

조금은 밀려나 있는 곳들과도 만날 여유가 있었다.


근처 국립공원에서 하이킹을 하고,

유서 깊은 극장에서 발레를 보고,

축구장에 가서 노비사드 축구팀을 응원했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좋아했던 장소는

도나우강을 따라 자연스레 형성된 모래사장이었다.

강변의 모래사장이라는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는 낯설어서 매력적이기도 했지만,

노비사드 시민들만의

조용하고 여유롭고 포근한 안식처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곳 사람들처럼

모래사장의 벤치에 앉아

느긋하게 책을 읽거나 커피를 마셨다.

으레 이런 곳에서 예상되는

바가지요금도 거의 없어서,

두 사람의 음료 값은 합쳐서

5천 원 정도면 충분했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아

커다란 발자국을 남기며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백조들과의 교감도 짜릿했다.



사실 우리가 여행한 국가들은

이처럼 매력적인 장소들을 저마다 갖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여행은

매력적이라고 알려져 있는

장소들을 직접 가보는 것인데,

이런 곳들을 방문하다 보면

그 나라 자체도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노비사드가 자랑하는

사진 속의 페트로바라딘 요새도

정말 멋진 곳이다.

사실 유서 깊은 건축물이 강가에 위치해 있다면,

그리고 그곳에서 탁 트인 전망을 볼 수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곳으로 향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나 역시도 요새에 올라가

유유히 흐르는 도나우강을 바라보며 산책을 했더니

노비사드와 세르비아에 대한 호감도가 급상승했다.

이곳은 아무런 문제나 갈등이 없는,

그저 아름답고 평화로운

낙원 같은 곳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대상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건 누구나 알지만,

특히나 여행은 시각에 상당 부분을

의존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지게 되면

우리의 이성은 마비되기 일쑤다.     


요새에서 바라본 노비사드와 세르비아는

정말로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때의 나의 감정이

세르비아의 진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여행객들이

미처 볼 수 없는 갈등과 분열의 장면들 역시

세르비아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세르비아는 인종청소로 대표되는

잔인한 학살 전쟁의 상징이었다.

아직 진행 중인 코소보와의 분쟁은

여전히 국제사회를 긴장하게 한다.

동유럽 내에서도 최빈국일 정도로

경제 사정도 좋지 않다.      


어쩌다 맑은 날에 남산타워에서 본

깨끗한 전망에 감탄한 외국인이

우리가 고통받는 미세먼지를

미처 알 수 없는 것처럼,

경복궁에 소풍 온 유치원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외국인들이

사립 유치원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까지는

미처 알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그들의 진짜 모습을 알기는 어렵다.     


한 도시에서 한 달을 여행한다고 해서,

멋지고 아름다운 여행지들뿐만 아니라

그곳의 사람들이 실제로 겪고 있는

현실의 문제들까지도 공유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 한 달은 여전히 짧다.

어쩌면 한 달간의 어중간한 경험들이

내가 마치 그 여행지를 충분히 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아집과 고정관념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은

결코 상대방의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반대의 경우에는 어떨까?

     

경제적으로 낙후된 국가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걸인들, 쓰레기들, 허름한 건물들은

그 나라의 인상에 마이너스 요소일 수밖에 없다.


세르비아의 주요 관광지들은

그런대로 관리가 되고 있지만,

중심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낡고, 어둡고, 황량하다.     


노비사드 근처의 작은 도시인

제문(Zemun)을 구경하고

깜깜한 밤에 들린 기차역의 매표소는

발을 들여놓기 꺼려질 정도였다.


어둑어둑한 조명은 안전한 느낌과 거리가 멀었고,

매표소에 달려 있는 방범창은 당장이라도

강도가 들이닥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벽면을 가득 메운 낙서들 중 상당수는

왠지 적나라한 욕설들일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심란해 보이는 매표소에서

아무 문제없이 기차표를 살 수 있었다.

매표소 창문 안쪽에서는 직원 아주머니께서

정상적으로 근무하고 계셨고,

비록 낙서 가득한 매표소였지만

주민들은 벤치에 앉아 자신들의 기차를 기다렸다.      


우리는 과연 이 기차역의 외면만을 보고

세르비아를 가난하고 지저분하고

관리도 안 되는 나라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우리가 여행지에서 겪은 경험이나

그곳에서 찍어온 수천 장의 사진들은

그 여행지가 품고 있는 이야기들의

극히 일부분만을 말해 줄 뿐이다.     


여행지를 평가하는 일에는

정말로 신중을 기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누군가로부터 나의 외모만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싶지 않은 것처럼.



세르비아를 여행하면서

우리를 가장 괴롭혔던 건 담배였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문제였다.      


유럽은 대개 한국보다 담배에 대해 관대해서

카페의 야외석이나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많다.


나와 아내 모두 비흡연자였기 때문에

종종 괴로운 상황들이 있었지만,

몇 개월의 여행으로

어느 정도 적응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르비아는

흡연자들에게 천국인 나라였다.


세르비아의 카페나 레스토랑은

대부분 실내에서 흡연이 가능하다.

실내의 몇몇 테이블이 금연석으로 지정되어 있지만,

그냥 흡연석 옆의 자리를

금연석이라고 지정해 놓았을 뿐이라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레스토랑의 서버들은 손님들이 꺼내 문 담배에

아무렇지도 않게 불을 붙여 주기도 한다.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카페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아이에게 공부 지도를 하는 모습은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세르비아의 모든 사람들이 흡연자는 아닐 텐데,

비흡연자들에 대한 처우가 불합리하다고 여겨졌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때면

동서남북에서 우릴 덮쳐 오는 담배 연기에

괴로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옷에 흠뻑 밴 담배 냄새 때문에

좌절하면서 분개한 적도 많았다.


담배 문제 때문에

분위기 있고 맛 좋은 커피 가게들을 가지 못하고,

그냥 동네 빵집이나 쇼핑몰에 가서

커피를 마신 경우들도 여러 번이었다.



세르비아의 시민 의식이 미성숙한 걸까?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한 달 내내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지만,

단정적으로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한 번은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식사를 위해 찾은 그 레스토랑 역시

뿌연 담배 연기와 독한 냄새가 가득했다.

금연석 중 한 곳에 자리를 잡았을 때,

우리 옆의 또 다른 금연석 테이블에 있던 한 명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려고 했다.      


사실 말뿐인 금연석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이 담배를 피우든 말든

포기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 앞을 지나가던 레스토랑의 서버가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금연석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제지했다.     


그 장면을 떠올리며 차분히 생각해보면,

세르비아로서는 흡연 문화를 개선시키고자

나름대로의 노력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금연석이었지만,

어쩌면 그것이 그들의 첫걸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세르비아는 노을이 참 예뻤다.

노비사드에서도, 베오그라드에서도

오렌지향이 물씬 풍길 것 같은 노을빛이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세르비아를 찾은 여행객들은

그 빛에 홀려 연신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얼마 후 아름다운 노을은 사라졌고,

어둠이 세르비아를 가득 채웠다.

어둠 속에서는 부랑자들과 소매치기들이

관광객들을 주시하면서

교묘하게, 때론 당당하게 그들의 일을 했다.     


장기간 여행을 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여행의 기간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루든,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우리는 어차피 여행지를 모두 경험할 수 없다.      


여행의 본질은

다른 문화권에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살고 있는

상대방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가 아닐까.

여행을 하고 있는 우리는 그저

여행지의 일부만을 경험할 뿐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이 전부 일리 없다.      


여행지에 대한 평가는 잠시 접어두고,

최대한 여러 번 곱씹으며

그들을 이해해보려 시도해 보는 건 어떨까.


우리 모두가

상대방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나를 대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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