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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세살이 Dec 19. 2018

공무원 그만두고 여행중인 30대의 성찰기, 세르비아편2

여행을 떠나기 전에

우리는 많은 정보를 찾아본다.

가야 할 장소, 머무를 시설, 먹을 음식처럼

우리는 여행지에서 우리가 만날 것들을

어느 정도 구상하고 예측할 수 있다.


정보의 홍수는 여행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여행과 관련된 정보 찾기는

이제 너무나도 간편하고 쉬운 일이 되었다.     


요즘은 여행지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뿐만 아니라,

여행지에서 느낄 주관적인 감정도

예측이 가능해진 세상이다.


수많은 여행 후기들을 통해서

우리는 런던과 바르셀로나가 주는

감성과 느낌이 어떨지 대강 알 수 있다.


어쩌면 지금의 여행이란 건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여행지의 감성과 느낌을

직접 확인하러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우리가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여행지의 사람들이다.


어떤 가이드북과 블로그와 유튜브도

우리가 여행을 하는 그 시점, 그 장소에서

만날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알려줄 수 없다.

런던의 이층버스에서

내 옆자리에 앉을 사람이 누구일지,

바르셀로나의 해변에서

돗자리를 팔고 있을 사람이 누구일지

누가 나에게 가르쳐 줄 수 있을까?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현지인들은

우리가 여행을 추억하는 데 있어서

생각보다 큰 비중을 차지한다.

현지인들과의 적극적인 대화나 교감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낯설지만 분명 이유가 있을

그들 나름대로의 삶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틀에 박힌 나의 생각과 태도가

조금은 유연해짐을 느낄 수 있다.      


우리도 한 달 동안

세르비아의 노비사드(Novi Sad)를 여행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은 나의 시선의 방향과 각도를

한층 풍부하고 입체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우리가 자주 찾았던 노비사드의 한 카페에는

서빙을 하는 할아버지들이 계셨다.


자리에 앉아 있으면

깔끔한 정장룩에 클래식한 멜빵을 맨

백발의 할아버지가 다가오신다.

메뉴판을 건네시고는

커피 종류 하나하나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신다.     


이 카페는 노인들만 근무하는 특수한 곳이 아닌,

젊은 서버들도 함께 근무하는 일반적인 카페였다.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신의 몫을 무리 없이 해 나가는

할아버지들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당당하고 세련된 할아버지 서버들은

이 카페가 어떤 영화의 세트장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마치 영화 킹스맨의 양복점에서

베테랑 요원이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어쩌면 저 할아버지들도

이 카페에서 비밀을 간직한 채

서빙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노비사드의 축구팀인

FC보이보디나의 경기장을 찾았다.

유럽에서도 변방인 세르비아 프로축구지만,

외부인들의 관심과 주목 여부가

어떤 것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절대적일 수 없다.      


경기장에서 만난 빨간 유니폼을 입은

덩치 좋은 아저씨는 VIP 카드를 보여 주면서

자신을 이 팀의 30년 지기 팬이라고

당당하게 소개했다.

그 아저씨를 비롯해

노비사드에서 나고 자란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팀을 열정적으로 응원했다.      


상대팀에 있는

검은 머리의 동양인 선수도 눈에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검색을 해 봤더니

‘료타 노마(Riota Noma)’라는 일본 선수였다.


2013년 무렵부터 몬테네그로나 세르비아 같은

동유럽의 축구팀들에서

준수한 활약을 하고 있는 듯했다.      


축구로 유명한 영국이나 스페인처럼

화려한 무대는 아니지만,

이 일본 선수는 낯선 세르비아에서

온 힘을 다해 뛰고 있었다.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아가면서.     



동유럽을 여행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발레를 보려고 노력했다.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의 발레는 수준이 높았고,

무엇보다도 말이 통하지 않아도

그들의 몸짓을 이해하고 감정을 느끼는데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의 노비사드에도

훌륭한 발레 극장이 있다.

단돈 6천 원에 1등석이라는 기쁨과 함께,

우리는 백조의 호수와 돈키호테를 관람했다.


두 작품에 출연하는 무용수들이 거의 같았다.

몇 주 간격으로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려면

고생하겠다는 생각에 안쓰럽기도 했고,

우리 동네 발레단인 것처럼 느껴져

친근하기도 했다.     


특히 두 작품에서 남자 주인공을 도맡았던

발레리노가 인상적이었다.

보는 사람이 조마조마할 정도로 멈추지 않고

파워풀하게 뛰어오르며 무대를 압도했다.


돈키호테가 마무리되어갈 무렵,

그 발레리노는 여느 때처럼 힘차게 점프하다가

무언가 잘못되었는지 황급히 무대 밖으로 사라졌다.

아마도 몸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그 발레리노 없이 나머지 공연이 진행됐고,

나를 포함한 모든 관객들은 그를 걱정했다.

다행스럽게도 마지막 무대 인사에

모습을 드러낸 그를 향해

관객들은 큰 박수로 위로하고 응원했다.


부디 아무런 이상 없이

지금 이 순간에도 무대 위에서

힘차게 춤추고 있기를.



노비사드의 한 복합쇼핑몰에서

한 무리의 아이들이

각각 빨간 헬멧과 파란 헬멧을 쓰고

겨루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 어디에서나 쉽게

한국의 흔적을 찾을 수는 있었지만,

태권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건

흔한 일은 아니지 않았을까?     


생각보다 큰 규모의 태권도 대회였던지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등 뒤에 한글로 ‘태권도’가 뚜렷하게 새겨진

도복을 입은 참가자들은

그 누구보다 진지하게 경기에 임했다.


나도 모르게 솟아오른 자부심과 함께

경기를 구경하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께서 나에게 말을 걸어오셨다.

대회에 관심을 보이는 나를 보고

내가 태권도의 나라에서 온 한국인이라고

짐작하시지 않았을까.


자신의 조카가 대회에 참가해서

함께 왔다는 이 분은,

내가 태권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물어보자

칭찬의 말들로 화답해 주었다.      


어깨가 으쓱해짐을 느끼면서,

나는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는 식으로

“그런데 태권도가 한국의 스포츠라는 건

알고 계신가요?”라고 물었다.


그분은 해맑게 미소를 지으며

“아니요, 몰랐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노비사드에서 우리는 에어비앤비를 통해

‘니콜라’라는 이름의 호스트의 집에서

한 달을 머물렀다.


여행지에 처음 도착을 때

숙소를 찾아가는 일이 가장 부담스러운데,

니콜라는 우리를 픽업해 주면서

동네 곳곳을 안내해 주는 친절함을 베풀었다.


그는 우리를 위해 택배를 받아 주었고,

5일마다 꼬박꼬박 침구류를 교체해 주었다.

한국과 세르비아 간의

축구 국가대표팀 친선경기를

TV로 볼 수 있었던 것도 니콜라 덕분이었다.     


3일을 여행했던 베오그라드에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시는

아파트의 방 한 칸을 빌려 숙박했다.


아파트 앞에 도착한 첫날,

문을 열어주기 위해 내려오신 할아버지는

키가 190cm 정도의 멋쟁이 꽃할배셨다.

저녁에 뵌 할머니는

능숙한 영어와 세련된 매너로

우리를 배려해 주셨다.

두 분의 집에서

고풍스러운 그림과 소품들을 구경하는 것도

즐거운 일 중 하나였다.



에어비앤비의 호스트들뿐 아니라,

세르비아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은

우리를 진심으로 환대해 주었다.


아내의 염색을 위해 찾았던

미용실의 디자이너 아주머니는

한국인을 처음 본다고 하시면서

우리를 귀한 손님으로 대해 주었다.


우리에게 말을 걸어 보고 싶었던지

숨차게 뛰어와 몇 시인지 물어봤던

두 꼬마 녀석들과도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노비사드에서 잡화점을 운영하는

중국인 아저씨와는

길거리에서 만나면 반갑게 목례했다.


베오그라드에서 만난 케이팝팬 소녀가

같이 사진을 찍자고 요청했을 땐

나도 마치 스타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 달의 여행을 마치고 세르비아를 떠나던 날,

종종 갔던 기차역 카페의 아저씨는

우리에게 행운을 빌어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세르비아 여행을 마치고

마케도니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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