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데이 May 24. 2018

당신이 쓴 당신의 이야기

[사랑의 흔적] 글 쓰기

우리는 연락하는 며칠간 매일 몇 시간씩 통화를 했다. 나중엔 어색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변명했지만. 치, 누가 어색한 사람이랑 몇 시간씩 통화를 하는지.

처음으로 통화한 날 밤, 그 사람은 자기가 틈틈이 글을 쓴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데이님은 글 쓰는 것 좋아해요?"

"예전엔 좋아했는데, 지금은 쓸 틈도 없고 잘 못써서 안 쓰게 되는 것 같아요."


대답은 했지만 정말로 부끄러워졌다. 취미는 일과 집 사이에 '운동'하나를 넣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때였고, 글이라곤 SNS에 간간히 쓰는 겨우 몇 줄짜리, 혹은 클라이언트에게 쓰는 메일이 전부였으니까.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라고 말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짓말이기도 했다. 난 사실 글 쓰는 걸 좋아한다. 수다쟁이가 말하는 걸 좋아하는 것처럼, 나는 못다 한 이야기를 글로 쓰는 걸 좋아했다. 엄마는 어려서부터 편지를 자주 쓰는 나에게 '너네 아빠 연애시절 같다'라고 했고, 모두가 잊고 싶은 싸이월드 시절에는 비공개, 공개 다이어리를 나누어 충만한 감성을 글로 써 내려갔다.

언변이 좋은 편은 아니라서 글을 쓰는 것이 더 편했고, 생각의 깊이가 남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서도 '나와는 다른 삶을 산 사람의 글이니 당연히 다르지!' 라며 비교하지 않아서 글 쓰는데 잘 써야겠다는 부담이 없었다.

서툴고 어설프고 깊이가 얕더라도, 다듬어지지 않은 내 글이 좋았다. 글을 쓸 때의 내 모습과 상황과 마음과 호흡이 오롯이 담겨 나중에 읽더라도 그때의 내가 떠오르는 그런 글 말이다.


SNS도 하지 않는다던 그는 선뜻 자기가 쓴 글을 보여주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많이 놀랐다.

차라리 SNS에서는 연출된 사진과 어디서 베껴온 멋들어진 문장 몇 줄이면 그 뒤에 진짜 나를 감출 수라도 있지, 글은 그 사람의 살아온 방식과 가치관, 성격, 관심사, 습관, 취미 등 모든 것을 대변하지 않나.

그런 글을 나에게 보여준다고? 이런저런 글을 쓴다고는 했지만, 통화가 끝난 후 들여다본 그의 글에는 그의 민낯보다 더 민낯 같은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있었다.

벼락치기처럼 몰아 쓴 글이 아니라, 꽤나 오랜 기간 동안 차곡차곡 쓰여온 글의 모음은 분량이 꽤 되었고, 나는 다음날 아침 동이 틀 때까지 그 글들을 꼼꼼히 눌러 읽었다.

그리고, 그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는 시간에도 읽었던 글을 읽고 또 읽었다. 그 사람을 더 잘 알고 싶어서.


'아, 이런 사람이구나.'


그 사람이 말해주지 않은 그의 모습을 그가 쓴 글을 통해 보았고, 난 그 사람을 더 깊이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라서.


여행할 때, 익숙하게 카메라를 제일 먼저 챙기는 나와는 달리, 그 사람은 펜과 노트를 챙긴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가 어설프게 찍은 여행 사진에는 노트와 펜이 걸쳐져 있었다.

'직업병인가?' 싶다가도 누구나 들고 다니는 핸드폰이 아닌 노트에 기록을 한다는 것마저 참 좋았다.

만약 그 사람이 펜과 노트가 아니라, 노트와 펜을 챙긴다고 했다면 난 그것도 참 멋지다고 생각했을 것 같지만. 그래. 그의 여행을 기록하는 방식이 좋은 게 아니라 그런 그 사람이 좋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 관계에 있어 스타트 총성은 듣지 못했지만, 그 사람이 이야기해준, 그리고 글을 통해 이야기 해준 그 사람의 시선이나 일상, 습관은 나에게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영향을 끼쳤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멀리해둔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고, 여행을 갈 때에는 카메라뿐 아니라 작은 노트와 펜도 함께 챙긴다. 메모 앱을 열어 일상 속의 특별함을 기록하고, 볼품은 없어도 솔직한 내 이야기들을 수다 떨듯이 글로 적는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마음과 생각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면, 당황하지 않고 그 순간을 솔직하게 기록한다. 직접 이야기할 수는 없어도, 내 마음이 나에게 하는 이야기들을.

덕분에 요즘 내 일기는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어느 시점에서 멈춰버린 이야기라 매번 도돌이표를 찍어가며 회상하는 게 전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작아지는 것은 아니니까.


내가 두 번의 여행을 다녀오고, 계절이 세 차례 바뀌는 동안 그 사람도 내가 본 마지막 모습과는 달라져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쓰여진 그 사람의 글이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래서, 그런 글을 쓰는 당신이 조금은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꼭 내가 아니라 당신 자신이라도 완전한 당신의 편이 되어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그런 당신이 또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런 글을 쓰는 내 이야기도 당신에게 닿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나에게 좋은 선물을 준 것처럼, 나도 그러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사랑한 너의 쇼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