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깔린 천변을 걷지 않아도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밤에 안양천을 걷던 날들은 모두 나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났을 때였다. 간에 큰 종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밤, 오래 만난 친구와 작별하기 전 날 밤, 미래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던 밤. 내 물건으로 가득 채운 집이 서서히 나를 가둬버릴 때, 걷기 편한 운동화를 꺼내 신고 안양천으로 걸었다.
안양천으로 가는 길엔 큰 아파트 단지가 있다. 세상 풍파로부터 안전해 보이는 집으로 둘러싸인이 상가 거리엔 걱정이 없어 보인다. 서로의 아이스크림을 뺏어 먹겠다고 앞만 보고 힘껏 달리는 천진한 아이들과 모처럼 외식을 즐긴 것 같은 화목한 가족. 이들 사이를 물컵 위로 붕 뜬 기름처럼 빠져나가다 보면 금천구청역이 보인다.
떠나는 사람과 도착하는 사람이 교차하는 역 앞은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모른다. 가만히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린다. 열차 시간처럼 인생의 시간이 딱 정해져 있으면 얼마나 편할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모두가 한 때 성장하고, 한 때 슬퍼하면 서로를 이해하기 더 쉬울 것 같았다.
밤의 안양천에는 부지런한 러너들과 자전거 동호인들, 바둑판을 정리하는 노인들이 눈에 띈다. 나는 그중에서도 지극히 평범하게 걷기 시작한다. 이 사람들도 잊고 싶은 것이 있기에 뛰고, 페달을 밟는 걸까? 앞으로 빠르게 나아가는 러너들 사이에서 천천히 걸으며 내 못난 불안과 고민을 친구에게 털어놓을 때면, 한 명의 스파이가 된 기분이었다. 고민을 멋지게 극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입만 놀리고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불행한 밤에 바삐 뛰는 사람들 사이로 숨어 걸을 곳이 있다는 건 행운이었다. 천변이 있다는 건 이래서 좋다는 건가. 이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면 안양천엔 안개가 낄 거다. 차갑지만 촉촉한 안개가 어둠을 위로해 돌려보낸 뒤, 어김없이 찾아온 열차에 몸을 싣는 누군가의 꾸준함이 아침을 열겠지. 지하철은 출발하고, 또 다음 열차가 온다.
이 단순한 달리기와 페달질, 열차의 오고감이 반복되는 안양천이 나 말고도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을 멈춰 서게 하고 걷게 했을까. 조용히 흐르는 물길이 오늘도 누군가를 쓰다듬을 거다.
*이 글은 금천청년기록단 활동 중 작성할 글이다. 기록용으로 개인 브런치에도 업로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