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동시에 불행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과연 변할 수 없는 것일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중에서.
젊음의 반대말은 늙음이 아니라 오늘이다. 젊음은 언제나 과거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무력함도 미래에서 되돌아보면 젊음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콕 박힌 태풍의 눈일 것이다. 언제나 젊음은 과거에 있었고 오늘도 언젠가 과거가 될 테니, 우리는 언제나 젊음을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제목을 다시 읽어본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괴테가 젊은 날 쓴 이 걸작은 베르테르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데 결국 슬픔을 제목에 붙였다. 결국 베르테르의 사랑은 슬픔으로 끝났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끝, 그 허무와 어쩔 수 없음에 압도당해 죽음이라는 한 가지 길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하지만 여기서 슬픔보다 젊음에 눈을 두면 베르테르의 죽음이 이해되기도 한다.
그저 내 마음속에 다음과 같은 진리의 소리를 깊이 되새겼다. 즉, 우리는 신이 우리를 대하듯 어린아이들을 대해야 하며, 신은 우리로 하여금 꿈속을 헤매듯 비틀거리게 할 때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해 주시는 것이라는 진리말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중에서.
젊은 날의 사랑은 생보다 죽음에 가깝다. 사랑으로 물이 올라 부풀어 오른 얼굴의 생기와 탱글함은 때로 주저 않고 죽음으로 달려 나갈 연료처럼 보인다. 푸르고 신비롭게 빛나는 매끈하고 검은 기름. 숨이 멎도록 상대를 바라보고, 고통도 사랑이라 여기며 기꺼이 끝으로 질주하는 젊은 사랑들. 그 무모함은 생보다 죽음에 가깝다. 이것이 곧 젊음의 특권 아닌가. 죽음으로부터 가장 멀리 서있기 때문에, 그곳으로 온 힘을 다해 내달릴 수 있는 용기. 결코 끝에 닿지 않을 것이라는, 아니 그런 생각조차 않을 수 있는 찬란한 무지.
사랑은 그 자체로 완성이다. 짝사랑만으로도 베르테르는 이미 충만하다. 그녀를 내 삶에 끌어들여 모든 것을 상상할 수 있는 백지의 축복을 얻는다. 나는 슬픔 속에 빠졌을 때 글을 쓰는데, 설렘과 행복에 가득 찬 날을 보낼 때도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과연 가능한 것인가? 소망에 대한 불확신으로 문단을 무책임하게 끝내고 다음으로 넘어가 본다.
오늘의 사랑은 생에 가깝다. 잘 사는 것, 삶과 함께 이어갈 수 있는 것, 돈, 안정, 조력. 젊은 날 동경해 마지않던 성숙과 안정에는 거추장스러운 장식품이 무게추처럼 달려있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된 것 같다. 오늘의 사랑엔 죽음이 없지만 여전히 슬픔이 있으니 그것으로 젊음을 느낀다. 사소한 서운함과 질투, 못난 욕망과 천진한 노래를 길게 붙잡는다.
다만 너무 젊어지려 할 땐 베르테르를 떠올리자. 스스로 머리에 총을 쏘아도 바로 죽지 못한 그 생명력이 이제는 마냥 부럽지 않다. 간신히 숨만 붙들고 있는 것이 더욱 고통스러웠을 그 시간들. 난 그 시간을 견뎌낼 맷집이 없다. 베르테르라고 있었겠냐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