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이아 May 10. 2024

심미적 감성 역량

2022 영어과 교육과정, 수업 현장 중계

"2022 개정교육과정 영어과 역량에 "심미적 감성 역량"이 들어왔습니다. 몇몇 분들이 문학작품의 감상을 통한 심미감성역량의 함양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요. 본격적인 문학과 예술 감상이 중요한 활동이긴 하지만 저는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소소한 것들에 깃든 아름다움도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저는 이상하게 영어를 배우던 초기에 현재 진행형 '~ing'가 좋았습니다. "She listens to music."도 좋지만 "She is listening to music."에 왠지 더 끌렸어요. 잠깐 옆길로 새자면 제2언어습득 연구에서도 '~ing'는 그 의미가 현저하고 발음도 귀에 꽂혀서 굉장히 이른 시기에 습득되는 형태소인데, 저는 그런 건 하나도 몰랐지만 "~ing" 발음이 신났어요. 음... 돌아보니 지금 바로 여기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존재에 환희를 느꼈던 걸지도 몰라요. 믿거나 말거나.


누군가는 /z/ 발음을 길게 하면서 신나 할수도 있죠. 누군가는 영어의 특정한 철자의 생김새가 신기하고 재미있을 수 있고요. 또 누군가는 영어의 특정 폰트가 멋지거나 예술적이라고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글자와 음소(phoneme) 수준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어요. 소리의 즐거움. 특정 소리를 내려 할 때 달라지는 구강의 모양. 혀의 굴림과 펼쳐짐. 그 모든 것들이 누군가에게 아름다울 수 있죠. 심지어는 발음이 잘 안되어 우스꽝스러워지는 자기 자신까지도요. 


2022 영어과 교육과정 역량 및 영역 (출처 2022 영어과 교육과정)


요즘 꽂힌 접두사(prefix)는 'un-'이예요. Undo, unlearn, unwind... 이게 화두가 된 이유는, 나름 이것저것 공부를 해왔고 그 분야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저를 돌아볼수록 제가 너무 좁은 영역 안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더 넓게 보고 경험하기 위해서는 'un-'해야 할 것들이 많더라고요. 그런데 컴퓨터의 undo는 깔끔하게 되지만 경험은 그렇지 않잖아요? 이게 되돌리기가 힘든 건, 경험과 지식이 제게 스며서  그런 것 같아요. 물이 든 거죠. 그래서 저는 종종 'unlearn'을 '물빼기'라고 말해요. 사실 unlearn이 쉬운 것 같지만, 물이 든 걸 빼는 건 엄청나게 어려운 거니까요. 


언젠가 한 초등학생에게 영어의 음운을 설명하려다가 그 친구가 야구에 관심이 있다는 게 기억나서 'str-'를 예로 든 적이 있어요. 'strike'의 그 'str'요. 이게 한국어 발음과 다르잖아요? 스트라이크에서 '스.트.르'가 아니라 /str/가 한꺼번에 나오는 거니까요. 그래서 /스/트/라/이/크가 아니라 'strike'이 한꺼번에 주루룩 나오는 거다라고 발음을 해 주었더니 재미있다고 'str-', 'str-'하면서 혀를 굴려가며 따라하는 거예요. 저도 괜히 신나더라고요. 


그 다음은 단어의 순서일텐데... 여러분은 혹시 누군가가 '젤 맘에 드는 영단어가 뭐냐?'고 물으면 뭐라 답하시겠어요? 이 질문 자체가 생소한 분들이 많으시지요? 저도 그래요. 그런데 예전에, 정말 아주 예전에 <닫힌 교문을 열며>라는 영화를 봤는데, 거기에서 L로 시작하는 단어 중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 셋이 있다는 거예요. Love, Liberty, 그리고 Labor라고요. 그렇게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겠지요. 아름다운 거 말고 비참하고 슬프고 숭고하고... 그런 단어들을 나열할 수도 있고요. 미적 경험이라는 게 꼭 '긍정적'일 필요는 없는 거니까요. 


제가 좀 진지한데 (웃음) 중학교 때 처음 integrity라는 단어를 배웠을 때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뜻도 발음도. '인/테/그러티'라고 괜히 따라해 봤다죠. /테/에 가는 강세나 /러/에서 약간 굴리는 듯한 느낌이 좋았어요. 고등학교 때는 'serene'이라는 단어를 봤는데 이게 '고요한, 평화로운' 같은 뜻이 있는데 제가 한국어 '시린'에 대해 갖고 있는 느낌이랑 너무 비슷한 거예요. 그래서 이 단어를 넘넘 좋아하게 되었죠. 


숙어 하나, 메타포 하나, 연어 하나, 팝송 가술 한 줄, 영화의 대사 하나... 그런 게 어떤 의미, 어떤 장면과 엮이는지... 그런 걸 생각하면 참 아름답지요. 잠깐 옆길로 새자면 학생들이 욕설을 잘 배우잖아요. 네 글자로 된 거. 그걸 왜 그리 잘 배우고 따라하겠어요? 그게 자신의 감정이나 정체성이랑 딱 엮여 있는데 그걸 발화하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반응하잖아요. 그렇다고 욕설을 가르치자는 건 아니고요. 욕설에 관심을 갖는 그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 기제에 관심을 기울이자는 거죠. 어떤 말이 그 사람의 내면과 연결되는지. 그리고 그렇게 표현되는 말들이 어떤 임팩트를 만들도록 디자인할지. 그런 것들이요. 


이런 면들을 생각하면 학생들이 <더블리너스>나 <로터리>를 읽어야만 심미적 경험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죠. 영어를 배우는 가장 첫 순간부터 아름다움과 말이 어떻게 엮이는지 조금씩 경험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대단한 건 아니죠. 어쩌면 우습기도 한 거고요. 하지만 아름다움은 그런 사소함과 떼어놓을 수 없어요. 


그래서 오늘의 결론은? 


아름다움은 도처에 있다. 글자의 모양에, 낯선 발음에, 접두사와 접미사에, 단어 하나하나에, 문법 구조에, 그것이 엮이는 문단과 글에. 그것을 읽어내는 우리들의 목소리에. 


여러분들에게 '심미적'인 언어경험은 어떤 것이었나요? 무엇이 여러분들을 웃게 만들었나요? 무언가를 해석하는 순간 찡했던 기억은 없나요? 수학 문제풀이만 짜릿한 건 아니잖아요. 기억할 수 없다면 이제부터 만들면 되죠. 아마 저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드실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런 아름다움을 경험했던 환희를 학생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세요. 거창하게 '미'라고 부르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일들이 영어수업시간에 벌어질 수 있도록 말이죠."


#심미적감성역량 #영어교육과정 #수업중계

작가의 이전글 비원어민은 인간이 아니라는 AI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