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자신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유튜브와 소셜미디어 온라인 쇼핑을 경험하면서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알고리즘’에 대해 생각하곤 합니다. ‘어떻게 이 책이 필요한 줄 알았지?’, ‘이거 내가 딱 필요한 영상인데!’라며 감탄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질문을 던져 보려고 합니다. ‘자기를 잘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단지 과거의 행위를 양적으로 기록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통계적 예측을 잘한다는 의미일까요? 그렇게 볼 수 있는 여지가 분명 있습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며, 그렇기에 과거의 기억을 있는 그대로 끄집어내거나, 그 모든 기억 속에서 패턴을 추출하여 다음 단계의 행위나 필요를 고도의 통계 기법으로 계산해 내진 못하니까요.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자신을 안다’에는 과거 통계치를 통해 미래에도 비슷한 성향을 증폭시키는 행위를을 예측한다는 것 이상의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과대평가하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알고 이를 끊임없이 상기합니다. 자신이 모르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주저하기도 합니다. 하고 싶지만 하지 않은/못 한 일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역량이 부족함을 인정하며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잘 안다는 것은 외면적인 현상 아래에 있는 의도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시스템은 모두 ‘좋아요’라는 행위로 기록될지 모르지만, ‘이 사진이 멋져서 좋아요’, ‘읽었다는 표시를 해야 하니 좋아요’, ‘무슨 감정이든 표현하고 싶은데 마땅한 감정 버튼이 없어서 좋아요’, 심지어 ‘더 이상 답글을 달기 싫어서 마무리하는 의미로 좋아요’라는 것을 아는 일 말입니다. 타인이 보기에는 비슷한 행동을 반복했지만, 그때마다 다른 기준과 다른 감정에 따라 행동했음을 기억할 수도 있겠죠. 수치로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결을 알고 있는 것, 그것이 자신을 잘 아는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정말 잘 아는 사람은 순간순간 이전과는 다른 행위를 계획하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김중식 시인의 싯구처럼 이전과는 다른 삶의 궤도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기대나 기계의 통계치를 ‘배반하고’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갈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런 의지를 언제 어떻게 발현할 수 있을지 호시탐탐 노리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이 모두 ‘A’라는 단어를 선택할 때, ‘B’라는 단어를 선택하는 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 그것이 자신을 잘 아는 일이지요. 이것들이야말로 진실로 자신을 잘 아는 것의 기준입니다.
그런 면에서 맞춤 광고나 제품 추천을 잘하는 것은 기계학습의 뛰어난 역량이 맞습니다. 더 많은 것을 쌓고 더 많은 것을 기억하고 더 정교한 통계 알고리즘을 돌리고 더 많은 것들과 연결시키는 능력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는 명제가 가지는 온전한 의미가 될 수는 없습니다. 더 많이 집적하고 더 빠르게 계산하고 더 정확하게 정보를 인출한다고 자기를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 망각은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이며, 잊는 것마저도 자신을 온전하게 만드는 요소이니까요.
자신에 대한 이해를 단지 과거의 데이터에 기반한 예측에 가둬 두지 않는다면, 글쓰기 또한 기존의 언어적 표현을 학습하고, 이를 조합하여 기존의 기준에서 정확한 문장을 생성하고, 이것을 기존에 글과 통계적으로 비슷한 내용과 구조로 구성하는 것에 그치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아래 롤랑 바르트가 개개인의 글쓰기에 가치를 부여하는 핵심 요소로 ‘ 에토스의 선택’을 제시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중략)
#생성형ai와삶을위한리터러시 #초안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