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에서 아이로
돌잔치를 따로 쓰지 않았다니. 괘씸한 아빠다.
돌이 지나면서 느껴지는 가장 큰 변화는, 아이의 존재감이다. 돌 이전에는 ‘아기’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아기’를 돌본다는 것은 객관의 세계이다. 아이에게 벌어지는 거의 모든 일은 이상적인 상태가 객관적으로 정해져있다. 굶주려선 안되고, 기저귀가 청결해야 한다. 어떤 이유에서건 아이가 몇시간 째 울고 있다면 그건 객관적인 잘못을 한 것이다.
반면 돌이 지나면 ‘아기’보다는 ‘아주 어린 아이’에 가까워진다. 어린 아이의 경우, 주관이 생긴다. 선택의 여지가 주어진다. 간식과 식사 중 더 선호하는 것, 잠과 놀이 중 더 선호하는 것, 분유와 이유식 중 더 선호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이 주관은 이전에는 없던 심리학적 고려사항을 동반한다. 아기일 때는 필요한 정답이 주어지지 않을 때의 객관적 상실감을 아기에게 주지 않으려 노력한다. 배가 고픈 아기에게 책을 읽어주는 건 아기가 이 세상에 대해 부정적 인상을 쌓아가게 할지도 모르니까.
어린 아이의 경우는 훨씬 복잡하다. 놀고 싶은데 놀지 못하는 상황은 놀 수 있을 때와 놀 수 없을 때로 나뉜다. 즉,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는 없다는 삶의 원칙을 학습하는 것과, 부모에게서 받을 수 있는 심리적 만족감을 경험하는 것 사이의 균형잡기가 필요한 것이다.
이 균형을 유지하는 데에 가장 필요한 것은 ‘원칙’이다. 그 원칙이 일관적일 수록 아이는 이 세상의 룰에 빠르게 적응할 것이다. 문제는 서른 여덟 먹은 나 조차도 그 룰에 온전히 적응하진 못했다는 사실이다. 소위 ‘애가 애를 키운다’는 말이 적용된다. 나 스스로가 지키는 원칙의 수준은 과연 아이에게 그대로 따라하라고 가르칠 정도인가, 사뭇 진지하게 성찰하게 된다. 여기서는 ‘애를 키워봐야 어른이 된다’는 말이 적용된다. 물론, 애를 키워도 어른답지 못한 어른들도 많다. 하지만 아마도 높은 확률로, 그 자식들이 그에게서 그다지 좋은 교육은 받지 못했을 것 같다.
좀 더 나아가자면, 과연 이 세상의 룰이란게 온전히 지켜져야할 수준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분명 어느 정도는 개선의 대상인 것이고, 그 중 일부는 우리 이이가 바꿔야할 대상일지도 모른다. 따라야 할 원칙을 가르쳐줄 뿐만 아니라, 어떤 원칙은 바꿔낼 수도 있으며 그러한 판단을 할 수 있는, 보다 상위의 원칙까지 가르쳐주는 것. 어찌보면 이것은 가정교육이나 육아의 차원이라기보다는, 철학, 사회학, 교육학, 정치학이 총망라되어야할 어마어마한 주제인 것이다.
그런 거다. 아이를 갖고 같이 산다는 것. 그 아이가 주관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올바른 길을 제안하는 것은, 이렇게도 어마어마한 일인 것이다. 그 어마어마한 일을, 그 많은 사람들이 그 오랜시간동안 해온 결과가, 지금 우리가 사는 버젼의 사회인 것이다. 나는 과연 충분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동시에, 주관을 갖게 되는 아이는 그만큼 복합적인, 때로는 미묘하고, 때로는 예상치못한, 때로는 충격적인 감동과 즐거움을 준다. 작은 행동과, 순간적인 의사소통에서 느껴지는 그런 즐거움의 깊이와 힘이 점점 달라진다. 이 행복감은, 아기 시절의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행복감과 경중을 따질 수는 없지만, 확실히 다른 카테고리에 속하는, 그래서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런 행복감이다. 이 말인 즉슨, 앞으로 오랜 시간 그런 생소한 기대이상의 행복감이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예상을 할 수 있게 한다.
어마어마한 책임감과 어마어마한 행복감.
아기에서 어린 아이로 성장한 과정에서 가장 먼저 느껴진 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