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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 탄생의 여운

바라는 것과 이루어지는 것

자연주의 출산의 핵심은 약물이나 수술 등의 의료적 개입을 '꼭 필요한 선'으로 제한하는 데에 있겠지만, 사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느 정도는 낭만적인 환상이 끼어들기 마련이다. 옥시토신 효과로 인해 산모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아늑한 조명 아래에서 엄마의 뱃속을 처음 나와 바로 엄마의 바깥 품에 안기는 아기. 그리고 아빠의 품에 안겨 양수를 통해 듣던 목소리를 실제로 처음 들으면 눈을 맞추는 이른바 '캥거루 케어'. 막 태어난 아기를 양수와 같은 온도의 물에 입욕시켜 생일 축하 노래와 아빠의 편지를 읽어주는, 강북삼성병원 특유의 이벤트인 '사랑수', 그 장면들이 주는 평화로움과 사랑스러움은 일종의 동경을 갖게 한다. 


그런 환상과 동경은 항상 그대로 이뤄지지만은 않는다. 꿈과 모험이 가득할 것 같은 테마파크는 사실 북적대는 사람들과 길고 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지루함이 공존한다. 이럴 때, 품어왔던 환상에 대한 욕심이 너무 크면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반대로 그 욕심을 어느 정도 조절한다면, 그 가운데에서도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아내의 뱃속에서 막 나온 아기는 아내의 품에 안겼다. 임신 중일 때 손으로 가리고 등을 돌려 제대로 볼 수 없었는 아이의 얼굴을 처음 볼 수 있었다. 감아져 있는 눈꼬리가 유난히 길었고, 아기자기한 콧매와 입술의 윤곽이 뚜렷했다. 스티비 원더의 가사처럼 less than 1 minute old 인 아이의 유난히 가늘고 긴 손가락과 발가락이 강한 인상을 남겼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즈음, 아이는 연약한 울음을 터뜨렸다. 한 생명이 태어나 처음 내어보는 울음소리는, 천하를 호령하는 장수도 무장해제시킬듯한 힘이 있었다. 


하지만 주치의 교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불과 1분도 채 되기 전에, 아이가 힘들어하는 것 같으니 잠깐 봐야겠다며, 나에게 수술용 가위를 쥐어주며 서둘러 탯줄을 자르라고 했다.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을뿐더러, 원래 탯줄의 맥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 후 탯줄을 자르려고 했었지만, 교수의 표정과 말투에서 한번 더 되물을 필요가 없다는 상황판단을 할 수 있었다. 서투르게 탯줄을 자른 후 간호사가 바로 아이를 신생아 침대에 눕혀 석션을 했고, 역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여전히 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두리번거려야 했다. 결국 아이는 신생아실로 향했다. 아내는 아이를 스쳐가듯 보내야 했고, 나는 목놓아 한국 의료계 최대 유행어인 '이보시오 의사 양반'을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나의 환상이었던 캥거루 케어의 기회도 아이와 함께 허망하게 품을 떠나갔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했고, 아내의 상태도 아주 좋다고 했다. 진통과 분만 모든 과정에서 아내는 초산 산모라는 사실을 믿기 힘들 정도의 강인함과 침착함을 보여왔어서, 오히려 의료진이 아내에게 고마워할 지경이었다. 아내와 나는 뒤늦게 아이가 나온 시간을 물어봤고, 한 간호사가 웃으며 오전 8시 51분이라 알려줬다. 내가 D-day의 선언문을 들은 지 6시간이 조금 더 지났을 뿐이었다. 아내와 늘 서로 존경하는 면에 대해 얘기해왔지만, 이 순간만큼은 존경을 넘어 위대함을 느끼게 됐다. 


이후 내가 계속 아내의 뒤에서 아내를 받치는 자세를 유지한 채, 태반이 나오고 몇 가지 추가적인 의료행위가 진행됐다. 아내는 몇 시간의 진통을 거쳐 방금 아이를 낳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태연했다. 얼마나 태연했는가 하면, '진짜 너무 아프다'는 말을 했다. 지금까지 들어온 출산의 고통에 관련한 모든 수식어들이 정확한 표현이었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이런 일생일대의 순간을 버텨내자마자, 불과 몇 분 만에 스스로를 객관화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일생일대의 순간을 한 번이라도 겪어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순식간에 병실이 비워졌고, 아내와 나와 장모님만 남았다. '진통'씬에 이어 '분만'씬까지 막을 내렸다. 


아내는 물을 마시고, 행정착오로 조금 늦게 들어온 미역국을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나는 갑작스러운 연락에 출근시간 막히는 길을 뚫고 조금 늦게 도착한 어머니를 맞았고, 신생아실에 부탁하여 아이를 잠깐 보여드렸다. 막상 나도 탄생의 순간에 잠시 바라본 후 꽤 오랜만에 본 아이의 얼굴이었다.  벌써 3번째 손주이지만, 두 아들과 두 손자를 거쳐 처음으로 여자아이를 가족으로 맞게 되신 어머니는, 연신 아이의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너무 예쁘다며 눈을 떼지 못하셨다. 물론 나도 그랬다. 


간호사는 산소 포화도 문제 때문에 아이를 신생아실로 옮겨야 했던 것이고, 현재 큰 문제는 없다고 했다. 다만 조금 더 지켜보아야 하므로 오후까지는 신생아실에 있어야 한다고 안내했다. 자연주의 출산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소위 '모자동실'이라고 부르는, 아이와 엄마가 같은 방에서 지내는 방식이다. 그래서 보통 기본적인 신생아 처치를 마친 후 다시 병실로 아이가 들어와야 하는데, 혹시 모를 응급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몇 시간 정도는 신생아실에 아이를 둬야 한다는 얘기였다. 


아이를 닳도록 바라보고 싶은 마음에서는 서운한 일이지만, 막상 병실에서 아내가 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아이가 준 선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가 지금 병실에 있다면, 아이가 조금이라도 소리를 내고 뒤척일 때마다 아내와 나는 온 신경을 쏟아부었을 테고, 결국 아내는 밤을 꼬박 새우며 아이를 낳고도 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늦은 오후까지는, 온전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아내와 나는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저녁이 되어 신생아실에서 연락이 왔다. 아이 상태가 좋아 보여서, 병실에서 지낼 수 있다는 소식이었다. 아내와 나는 락스타의 무대를 기다리듯 아이를 기다렸다. 나보다 더 아이를 못 봤던 아내가, 병실로 들어오는 아이를 바라보던 눈빛이 기억난다.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은, 그냥 그 표정만 정지화면으로 보더라도 지금 이 사람이 자신의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다른 어떤 표정과도 구별되는 그런 표정이었다. 


곧이어 아내는 처음으로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간호사가 차근차근 알려주고 장모님이 도와주셨지만, 아이에게도 아내에게도 처음인 일인지라 당연히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 아이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았었고 반드시 젖을 먹어야 할 시간대였던지라, 간호사는 아이를 신생아실로 다시 데려가 분유 보충 수유를 해야겠다고 했다. 이후 전화가 와서 아무래도 오늘 밤은 아이를 신생아실에서 지내게 하고, 내일 아침 목욕까지 마친 후에 다시 병실로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 하는 수 없이, 아이는 또 그렇게 스쳐가듯 저만치에 있었다. 


아내가 마실 이온음료와 간식거리 등을 사기 위해 편의점에 다녀오는 동안, 분만실이 북적임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만 2명의 아이가 더 태어난 모양이었다. 입원이 조금만 늦었어도 지금 우리가 머무는 병실에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른 산모와 가족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늑한 안도감을 느꼈다. 


방에 들어와 아내와 나는 머지않아 이내 잠이 들었다. 잠이 드는 순간 문득 다시금 깨달았다. 지금의 이 휴식은 아이가 주는 선물이라는 사실. 아이가 조금 늦게 신호를 줬더라면 이 편안한 병실을 얻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 아이가 병실에 함께 있다면 낮과 마찬가지로 아내와 나는 쉬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아내는 모유수유를 위해 새벽에 일어나 수유실에 다녀와야 했지만, 그 밖의 시간은 편히 쉴 수 있었다. 


캥거루 케어와 사랑수, 첫날부터 아이와 함께 지내는 모자동실을 모두 하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매우 실망스러울 일이었다. 아내는 유도제도 무통주사도 맞지 않은 채 스스로의 힘으로만 아이를 낳은 것이 비해, 갓 태어난 아이를 안고서 심적인 보상을 받을 수 있을만한 충분한 시간을 갖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아이를 신생아실로 보내야 하는 순간순간의 아쉬움은 사무칠지언정, 병원 자체를 잘못 선택했다든가, 굳이 자연주의 출산을 할 필요가 없었다든가 하는 후회는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러한 후회는, 테마파크로의 소풍을 앞두고 모든 놀이기구를 다 타고야 말겠다는 포부에 너무 집착한 아이가 소풍 당일에 마주하게 되는 짜증과 배신감 같은 것이다. 분명 테마파크의 긴 줄과 북적이는 사람들은 그 전날의 포부에 반하는 것이지만, 이와는 별개로 모든 테마파크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기 마련이고 그것은 충분히 즐길만한 일이다. 오히려 친구들과 긴 줄에 서서 기다리는 과정에서 나누는 농담과 지루함을 이기 위해 급조하는 끝말잇기 류의 게임 과정에서 잊지 못할 추억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말이다. 


말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늘 순간순간의 기지와 치밀한 노력으로 내가 바라던 바를 반드시 이루겠다는 욕심에 가득 차있었다. 내가 준비한 여행은 항상 시간낭비가 없으면서도 너무 빡빡하지만은 않으면서 남들이 다들 가는 곳과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곳이 적절한 균형을 이뤄야 했다. 내가 쓰는 글은 항상 어딘가 좀 달라야 했고, 내가 준비하는 프레젠테이션은 너무 딱딱한 것도 너무 멋 부린 것도 아니어야 했다. 내가 테마파크로 소풍을 갈 때는 반드시 최적의 동선과 시간 안배로 구현 가능한 범위 내에서 가장 효율적인 놀이기구 탑승 계획이 갖춰져야 했다. 


30대 중반이 지나면서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을 숱하게 만나고, 내가 턱없이 부족한 영역들을 끝없이 발견하게 되면서, 이러한 욕심은 점점 무뎌지긴 한다. 하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마지막 한가닥 질긴 힘줄은, '내가 바라는 건 내가 이뤄지게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기만한 내 욕심이었다. 이 욕심은, 아이의 출산이라는, 내가 직접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는 영역이면서 동시에 내가 경험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숭고한 영역을 맞으며, 비로소 툭 끊어버렸다. 


내가 바라는 대로 이뤄져야 할 이유라는 건 없다. 이뤄질 일은, 이뤄져야 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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