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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인색하고 까다로운 벽

상담, 김주환 교수, 그리고 Stutz

어느 날 우연히 유튜브에서 김주환 교수의 온라인 강의를 보게 됐다. 우울증이 발병하기 전이었다. 강의 내용은 마음 챙김(mindfulness)에 관심이 있던 나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기억나는 대로 적어보자면 이렇다.


- 기존 심리학 및 뇌과학 이론에서는 다양한 감정에 따라 활성화되는 뇌 부위가 있다고 여겨왔으나, 최근 연구 결과는 감정이라는 것이 사실은 한 가지라고 밝히고 있다.

- 긍정적인 감정은 사실 감정이 아니라 인지결과에 대한 뇌의 사고적 해석이다.

- 부정적인 감정은 편도체 활성화에 따른 신체기관의 감각정보를 대뇌가 다시 인지하는 것이다.

- 편도체는 맹수를 만났거나 자연재해를 맞닥뜨릴 때 활성화되어 신체를 비상상황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 상황이 종료되면 다시 안정화된다.

- 그런데 현대인들은 시험, 업무, 경제적 상황 등으로 인해 편도체가 계속 활성화돼 있다.

- 편도체와 대뇌전전두엽피질은 어느 한쪽이 활성화되면 다른 한쪽이 안정화되는 시소 같은 관계에 있다.

- 대뇌전전두엽피질은 진화적으로 가장 마지막에 형성된 부위로, 복합적이고 추상적인 사고를 수행한다.

- 현대인들 중 편도체가 지속 활성화 돼있는 사람들은 그만큼 대뇌전전두엽피질이 제 기능을 못하게 되고, 이 것이 여러 가지 문제로 이어진다.

- 예로부터 전해진 명상, 요가, 태극권, 기도 같은 행위나, 현대에 개발된 인지행동치료, 소마틱스운동 등은 모두 편도체를 안정시키고 대뇌전전두엽피질을 활성화하는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맥락이 같다.


꽤 복잡하지만 뚜렷하고 일관된 메시지에 빨려 들었고, 근거로 제시되는 논문 및 연구결과들에 나 자신이 설득되기에는 충분한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게 높은 신뢰감이 형성돼 있을 때 이어진 내용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어서 1시간이 넘는 긴 영상을 끝까지 보게 됐다. 그 내용은 이렇다.


- 기존 이론에서는 인간이 ‘나’를 인지하는 시스템과 ‘남’을 인지하는 시스템이 분리돼 있다고 여겨왔다.

- 하지만 최근 연구 결과는 인간이 ‘나’와 ‘남’을 동일한 시스템으로 인지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 새로운 가설이 사실이라면, 소위 말하는 ‘내로남불’, 그러니까 나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인색한 사고패턴에 모순이 된다. 그럼에도 나는 저 가설이 훨씬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다. '내로남불' 상황은 보통 한 사람이 타인에게 하는 '말'과 자기 자신이 실제로 한 '행동'의 모순이지, 그 사람의 내면에 대한 얘기는 아니기도 하다. 가만 생각해 보면 남에게 인색한 사람이 자신에게도 인색하고, 남에게 관대한 사람이 자신에게도 관대한 경우를 경험한 적이 너무나도 많았다. 


내로남불에 해당하는 상황을 돌이켜보더라도 남에게 인색한 사람이 실제로 자신에게 그렇게 '관대'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런 상황은 사실 나에게 관대하다기보다는 자신의 행동에 방어적인 경우가 많아 보였다. 자신을 방어한다면 누구로부터 방어할까. 남들의 비난으로부터? 사실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겨누는 비난의 화살에 대한 방어이지 않을까.


이 가설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김주환 교수가 제시하는 방법론은 ‘내면소통’이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요가나 명상 같은 활동을 통해 내 신체의 감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훈련을 하고, 나아가 용서, 수용, 연민, 감사, 존중, 사랑과 같은 사고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면서 자연스럽게 타인에게도 적용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과도하게 활성화된 현대인의 편도체를 안정화시키고, 기능이 떨어졌던 전전두엽피질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골자이다. 이미 설득된 나는, 요가도 하고 명상도 이어가고 집에서 할 수 있는 소마틱스 운동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용서, 수용, 연민, 감사, 존중, 사랑을 나 자신에게 적용한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 감이 잘 오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춤을 전혀 추지 못하는 뻣뻣한 사람이 아주 빠르고 복잡한 안무를 배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인지는 대략 이해가 가지만, 내가 지금 그 상태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금 가까워지고 있기는 한 건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혼란스러웠다.



비슷한 시기에 아내와 함께 넷플릭스에서 ‘스터츠(Stutz)’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다. 할리우드 배우 ‘조나 힐’이 심한 우울증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필 스터츠’라는 저명한 정신과의사를 만나 치료를 받게 됐고, 그의 접근 방식이 독특하고 크게 도움을 받아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든 것이었다. 이 역시 나의 우울증이 발병하기 이전 시기였지만, 그의 독특한 접근방식에 매료됐다. 그 내용은 이렇다.


- 70년대 심리학, 정신의학에서 상담치료는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등의 증상이 나타는 원인을 과거에서 찾아내려는 경향이 강하다.

- 하지만 과거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 증상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어릴 적 바다에 빠질 뻔했던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아 불안장애가 생긴 환자가 있다고 할 때, 그 환자가 그 트라우마가 불안장애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자명하게 인지하고 있다고 해도 불안증상이 흩어지듯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 필 스터츠 박사는 뭔가 추가적인 처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환자들에게 ‘이렇게 해보세요’라고 제안해서 그렇게 하면 증상이 실제로 줄어들거나 없어지는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오랜 연구와 고민 끝에 몇 가지 방법을 개발해 냈고, 그 방법들을 스터츠 박사는 툴(Tools)이라고 부른다.


‘툴’은 일종의 사고훈련이다. 하나를 예로 들자면, 내가 정말 불편해하는 사람과 대화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할 때 머릿속으로 이런 모습을 떠올린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그 ‘사랑’이라는 감정이 형성화돼서 내 몸을 가득 채우는 상상을 한다. 그렇게 내 몸이 마치 터지기 직전의 커다란 풍선처럼 사랑의 감정으로 가득 차오른다고 상상하면서 그 모습과 그 충만한 느낌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 상상을 그대로 내가 마주해야 하는 그 사람의 몸으로 불어넣는 모습을 상상한다. 하지만 내 몸에 차 있던 사랑이 빠져나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으로 리필되듯 다시 내 몸에도 가득 찬다고 상상한다.


그냥 말로만 보면 좀 유치해 보이는 구석이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실제로 회사생활을 하면서 이 ‘툴’을 사용해 본 결과는 꽤 인상적이었다. 그냥 상상을 하는 것이다 보니 ’ 툴‘을 사용하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은 고작해야 십 초 정도이지만, 그 십 초가 지난 후 내가 피하고 싶았던 그 대화를 하는 나의 태도나 마음이 전혀 다름을 체감할 수 있었다. 물론 십 초 만에 그에 대한 감정이 모두 사라진다거나 갑자기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도 모르게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그 ’ 싫은 마음‘, ’이 사람과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그럭저럭 괜찮은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영화의 중반부부터 '그림자(shadow)'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개념이지만 되도록 짧게 정리한다면, 나 자신이 억압해 온 자아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 상에서 감독이자 환자인 조나 힐은 자신의 '그림자'를 설명하면서 비만으로 인해 친구들에게 놀림과 따돌림을 당하던 학창 시절의 트라우마를 설명하고, 그때 형성된 자기 비하와 자기혐오의 감정을 설명한다. 지금은 할리우드에서 남부럽지 않은 인기와 부를 지닌 유명인이지만, 그의 내면 한구석에는 스스로가 외면하고 억압하는 과체중의 10대 소년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소년으로서의 자아가 바로 스터츠 박사가 말하는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자'라는 개념은 프로이트나 융의 정신분석학에 뿌리를 둔 개념이어서, 많은 심리학자, 정신분석학자, 정신과의사들이 언급하는 개념이다. 그중 스터츠 박사의 접근이 지니는 특이한 점은, 내면의 '그림자'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상상 속에서 그 그림자와 직접 소통하는 방향이라는 점이다. 영화를 볼 때 이 지점에서 나는 매우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동시에, 나 자신의 그림자는 어떤 모습인지를 생각해 내는 데에 다소 어려움을 느꼈다. 


내 그림자는 유년 시절일까. 잘 울고 징징대긴 했지만 내 기억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는데. 학창 시절은 나름 무난했는데. 대학시절도 괜찮았던 것 같고 사회생활 하면서도 특별히 어둡게 느껴지는 시기는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나의 자아가 너무나 건강하기 때문에 그림자가 없다고 여겨지진 않았음에도, 나는 나의 그림자를 형상화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번아웃 우울증이 발병했다. 나는, 아마도 내가 너무 깊이 숨겨두어 나 자신조차도 그 모습을 그릴 수 없는 그림자를 찾아내고 싶었다. 



우울증 발병 후 몇 차례의 상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금씩 그림자의 윤곽이 드러났다. 내가 상상했던 나의 그림자는 나도 모른 채 오랜 시간 억압해 온 나의 어린 시절의 어떤 모습이 두꺼운 먼지에 뒤덮여 웅크리고 있을 듯했다. 하지만 조금씩 느껴지는 윤곽은 조금 다른 차원에 있었다. 


그 윤곽은 전편에 언급했던, 내가 나 자신을 측은하게 여겨본 적이 없었다는 점과 이어진다. 큰 조직 생활보다는 주로 창업 위주였던 경력은 많은 실패나 위기 경험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일과 인간관계에 대한 내 나름의 기준이 형성됐다. 그 기준은 다분히 '남들의 인정'을 향해 있었다.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러야 하고, 그러려면 사업에 있어서는 어떤 모습을 갖춰야 하고, 일을 하면서 만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떤 사람으로 비쳐야 하는 등등의 기준들. 첫 상담에서 말한 '고단한 삶'의 이유는 그런 수많은 기준들에서 비롯됐다. 사실은 나 스스로가 만든 그 기준들 사이에서 나 자신이 온갖 애를 써왔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애쓰는 나 자신의 한 면을 측은하게 여기는 방향으로의 시선은 가져본 적 없이, 아직 부족하니 지금 이 시련마저 이겨내야 한다고 닦달하는 방향에서의 시선만을 유지해 왔다. 


상담을 통해 그런 나 자신에 대한 측은함, 어떤 면에서는 다소간의 대견함 같은 감정을 가져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그림자의 윤곽이 드러났다. 나의 그림자는 어쩌면 바로 얼마 전까지 내가 세운 기준들의 높다랗고 수많은 기둥들에 둘러싸여 숨차하는 나 자신이었을지 모른다. 내 그림자는 그렇게 깊숙한 곳에 숨겨져 온 것이 아니라 늘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의식하고 있던, 그저 나 자신일지 모른다. 


비유하자면, 어딘가 몸에 이상이 있다고 생각해 왔고, 분명 저 깊은 척추 속 어딘가이거나, 아니면 이름도 알기 어려운 두뇌의 어느 한 부위이거나 하는 숨겨진 곳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여겨왔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진찰을 하다 보니 팔이나 다리처럼 늘 사용하고 눈에 쉽게 띄는 곳에 골절이 있었고, 그저 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뿐이었던 것이다. 


내가 세운 스스로에 대한 수많은 기준은 하나하나 높은기둥을 이루고 수많은 그 기둥들이 벽을 이뤄버린 사이, 나는 그 벽에 갇힌 나 자신을 의식하지 않았다. 그 벽 안쪽에서 허덕이는 것도, 그 벽을 세운 것도, 그저 나 자신이었다. 


이어지는 상담을 통해 이러한 발견은 조금씩 더 구체화됐다. 조금씩 조금씩 알 수 있었다. 용서, 수용, 연민, 감사, 존중, 사랑을 나 자신에게 적용한다는 것. 내 그림자를 마주한다는 것. 


- 다음화에 계속 - 



김주환 교수의 <내면소통>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1078049


넷플릭스 - 스터츠, 마음을 다스리는 마스터 

https://www.netflix.com/kr/title/81387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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