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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을 찾지 않기. 하고 싶은 걸 선택하기.

번아웃 우울증이 처음 발병한 시기부터 몇 개월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중요한 고민이 있었다. 퇴사를 할 것인가, 아니면 회사 업무를 유지하면서 치료해 나갈 것인가. 고민의 포인트는 이 질문을 보는 순간 누구나 떠올릴 바로 그 포인트 들이었다. 지금의 경제적 여건을 퇴사를 하고 나서도 유지할 수 있을까. 혹시 여건이 악화된다면 더 큰 스트레스로 오히려 우울증이 악화되지 않을까. 그러다가 다른 일을 찾았다고 해도 그 업무여건이 지금의 업무여건 보다 낫다는 보장은 없지 않을까. 


발병 초기에 정신건강의학과 원장님이 말씀해 주신 견해는 매우 간결하고 설득력 있었다. 현재 상태는 정서나 신체증상뿐만 아니라 사고력 또한 저하되어 있기 때문에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를 권장하지 않는다는 전문가로서의 견해였다. 리스크가 적은 순서대로, 우선 휴가를 최대한 내보고 그래도 부족하면 휴직을 하면서 회복할 시간을 갖고, 조금 더 나아진 상태에서 결정을 내리는 게 좋겠다는 말씀에 이견 없이 그대로 따랐다. 


최대한의 휴가를 사용하고, 조금씩 회복하는 과정에서 회사의 양해 덕분에 점진적으로 업무에 복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휴가와 업무 복귀 과정에서도 저 고민은 계속됐다. 상담 과정에서 그 고민을 말하면서, 전에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관점의 의견을 듣게 됐다. 내가 마치 '정답'이 있다고 전제하고 그 정답을 찾아내려는 듯한 태도라는 것이다. 상담가 선생님의 그 말씀을 듣기 전에도 내가 그러한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다만 전에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은, 그런 태도 말고 다른 태도를 지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주식 투자를 한다고 하자. '이 종목이 오를까 안 오를까', '어떤 종목이 가장 많이 오를까' 같은 생각에 대해 나는 일종의 '추리'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추리'라는 것은 무언가 알아내고자 하는 바가 있다고 할 때 다른 단서들을 통해 그것을 논리적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 '알아내고자 하는 바'를 마치 '정해져 있는 것'처럼 여겨왔다. 이 종목이 오를지 내릴지는 정해져 있고, 그걸 맞춘 사람은 수익을 얻는다는 관점인 셈이다. 어떤 종목이 가장 많이 오를지에 대한 미래는 정해져 있고, 내가 그걸 맞추고 싶다는 의지를 갖는 식이다. 


퇴사 문제에 대해서도 동일한 관점으로 접근했다. 치료를 위해 퇴사를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해, 퇴사를 해서 치료가 된 미래를 기대할 것인가, 회사를 떠나지 않고도 우울증을 극복해 내는 미래를 기대할 것인가, 어느 쪽이 실제 실현될 미래인가를 추리하려 했던 것이다. 내 추리가 틀린다면, 그러니까 실현되지 않을 미래 쪽을 선택한다면 나는 마치 잘못된 종목에 투자한 투자자처럼 손해를 보게 될 것이고, 그러한 손실을 피하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이어갔다.


상담 과정에서 깨달았다. 나는 어떤 유형의 사안에 대해서는 늘 이런 태도만을 유지했다. 마치 다른 옵션이 없는 것 같이 일관적이었다. 다른 옵션을 선택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염두에 두어 본 적도 조차 없었다. 정해져 있을 정답이 아닌 쪽을 어떻게든 회피하고 정답을 찾고자 하는 태도. 마치 정답을 맞히지 못하면 정말 큰 일이라도 날 것이라 생각하는 듯한 태도. 그 큰일을 막기 위해 이어지는 고민. 이런 기억들은 때때로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드러난 경우도 있고, 후회가 가득한 결말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한쪽이 더 우세하진 않았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그 고민의 과정은 한결같이 힘들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는 다른 유형의 사안에 대해서는 전혀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대학시절 배낭여행에서 번지점프대를 뛰어내린 기억과 같은 맥락을 이루는 경험들이 있었다. 그 경험들 속에서의 나는 과감했고 이익과 손해의 개념보다는 직관과 열정을 따랐다. 고민이 개입할 여지는 별로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런 경험들은 돌이켜봤을 때 후회라는 단어와는 아주 거리가 먼 곳의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힘들다기보다는 주로 즐겁고 짜릿했다. 


많은 경우 그렇듯,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삶에 '정답'이란 존재할 수 없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도 않고, 혹여 정해져 있다 한들 내가 계속해서 그 미래를 맞출 수는 없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찾기 위해 고민을 아무리 이어봤자 그 끝이 자연스레 도출되진 않는다. 내가 아무리 문제풀이 하듯 삶에 임하더라도 실제로 내가 하는 행위는 '선택'이다. 내가 정답을 고민했던 모든 기억은 힘겨웠고, 스스로 선택했던 모든 기억은 즐거웠다. 


정신과 원장님과 상담가 선생님 모두, 퇴사에 대한 나의 고민에 대해 같은 견해를 남겼다. 정답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시라. 



이후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그 차이를 알아가는 중이다. 나는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정답을 찾으려 하고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선택했는지. 내가 정답을 찾으려 했던 사안들은, 퇴사에 대한 고민을 포함하여, 남들의 평가와 관련된 사안들이었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평소에 친한 친구를 만나러 나간다면 옷을 입는 데에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지만, 내가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하는 업무미팅을 하러 나간다면 고민에 빠지는 것이다. 친한 친구는 나에 대한 평가를 하지도 않고, 혹시 한다 하더라도 내가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업무미팅에서는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하므로 상대방이 나의 옷차림을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 고민이 시작된다. 


옷차림이야 비교적 간단히 상황이 종료되지만 현실에서는 좀 더 복잡한 사안들이 있다. 단순한 미팅이 아니라 어떤 행사에서의 발표자리라면 나를 평가할 타인이 여러 명일 수도 있다. 어딘가에 게재될 글을 쓴다면 그 평가자는 여러 명의 수준을 넘는, 무수히 많은 대중들일 수도 있다. 더 거창하게 생각한다면 어떤 경우에는 평가자가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먼 미래의 후손들, 그러니까 '역사의 평가'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사안들에 대해 '정답'을 찾는 것은 자명하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타인의 평가에 대해서는 정답을 찾으려 했다. 정답을 맞히지 못했을 때 벌어질 부정적인 평가가 그만큼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거의 모든 상황에서 나는 타인의 평가를 직접 확인하지 않는다. 업무미팅에서 내 옷차림을 보고 '옷차림을 보니 인상이 정말 나쁘시네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내가 한 발표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나 내 글을 읽은 불특정 한 대중들이 나에게 단체로 부정적인 피드백을 남기는 수고를 감수하는 경우 또한 없다. 역사의 평가는 말 그대로 먼 미래에 벌어질 일이므로 나는 알 수 조차 없다. 


다만 내가 실제로 확인하는 것은 어떤 파편들이다. 업무미팅에서 다소 관심이 떨어진 듯한 눈빛의 찰나. 청중들 중 일부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한 장면. 한두 개의 댓글. 그 파편들로부터 이어지는 것은 나의 해석이다. 이거 봐 아까 그 옷을 입었어야 돼. 이번 발표는 정말 망했어. 내 글은 형편없어. 나는 웃음거리가 될 거야. 


내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타인의 부정적인 평가가 아니다. 나의, 나 자신에 대한 부정적 평가이다. 나는 내 멋대로 상정한 기준에 '타인의 평가'라는 이름표를 붙여두고, 그 기준에 부합하는 '정답'이라는 것을 찾아내려 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기준이었으므로 정답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모든 것이 끝나고 난 후에 나 스스로에 대한 자책만이 남고, 그 자책의 몽둥이로 흠씬 두드려 맞아 만신창이가 된 나 자신만이 남아왔다. 


한편,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했다면 결말이 달라진다. 업무미팅이든 뭐든 내가 좋아하는 옷을 입는다. 상대방이 만에 하나라도 옷차림을 지적한다 한들, 그와 나의 취향차이를 확인하는 것 외에 달리 더 벌어질 일은 없다. 내가 발표하고 싶었던 내용을 착실하게 준비하여 발표했다면, 모든 청중들이 단체로 하품을 한다 한들 '이 내용에 대해 다들 졸려하는구나'라는 인지가 그 결말이 된다. 애초에 내 행위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는 '타인의 긍정적 평가'라는 기준을 충족하기 위함이었다면, 그 목표를 달성해 내거나 실패하거나 둘 중 하나가 사건의 종료점이 된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한다면, 이미 옷을 입고 발표를 하는 그 시점에 내 행위는 종료되고 그 뒤에 발생하는 일들은 관련된 다른 사건이 된다. 


타인의 평가도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나 스스로가 단정 짓는 거라면, 결국 정답이든 선택이든 내가 그 결론을 짓는 셈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명확하다.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을 바탕으로 하더라도 비교할 수 없이 즐거웠던 쪽, 정신과 원장님과 상담가 선생님이 공통적으로 언급했던 쪽, 수많은 책과 현명하 이들의 말속에 남아있는 결론은 '나의 선택'이다. 정답을 찾으려 하지 않고,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로 주의를 옮기는 것. 이것으로 조금 더 나 자신과의 관계가 단단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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