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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에게 닫았던 문을 열며

내려두었던 음악을 다시 시작하다

중학생 시절이었는지 고등학생 시절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어느 평범했던 저녁, 거실에서 TV를 보다가 부모님과 내 진로에 대한 가벼운 대화를 할 때였다. 몇 가지 직업 혹은 몇몇 대학에 대한 얘기를 하던 과정에서 나는 이런 말을 했었다. '내가 할 줄 아는 것 중에 음악에 대한 능력이 제일 커요.' 어렴풋한 내 기억에 이 얘기를 들으신 부모님은 약간의 우려, 그러니까 이 녀석이 진짜 그냥 가수가 되겠다는 건 아닐까 하는 반응을 감추지는 못하셨지만, 그렇다고 뭐라 하지도 않으셨던 것 같다. 그저 나는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음악이라는 것에 대해 진지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첫 번째 직장에서 한 번에 풀어내기에는 너무 긴 어떤 사연으로 인해 2년 만에 퇴사를 하고 홍대 인디씬에서 본격적인 음악생활을 시작했단. 락밴드의 프로듀서로서, 간간히 광고음악이나 방송용 음악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몇 년을 보냈다. 프로듀서로서 제작했던 밴드가 TV에 나오기도 하고, 유명한 페스티벌에 출연하기도 하는 상승곡선을 그려보기도 하고, 몇 달째 이렇다 할 수입이 없어서 다 같이 궁핍한 생활을 하는 시기를 겪기도 했다. 그러다 첫 직장에서의 인맥을 통해 사업을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됐고, 매출이 생기면서 경제적으로 숨통이 트이게 됐다. 첫 한두 해는 음악생활과 사업을 병행을 하다가, 어느 시점부터 사업의 비중이 점점 커졌다. 그러다 어느 시점부터는 음악에서 손을 떼게 됐다. 그 후 10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4번의 창업을 했고 그중 한 번은 다른 유명한 회사에서 내가 창업한 회사를 파는, 소위 'Exit'을 했다. 


음악에서 손을 떼고 사업에 매진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음악이라는 것에 미련이 남은 나머지, 전에 알고 지내던 뮤지션들이 TV에 나오거나, 어떤 뮤지션이 인기를 얻는 모습을 보면 어느 정도의 시샘을 느꼈다. 더 시간이 지나자 그런 시샘도 점점 무뎌졌다. 유튜브를 통해 새로운 뮤지션들의 놀라운 음악성과 연주력을 목격하면서 음악을 그만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더 시간이 지나자, 음악을 그만두길 잘 한 정도가 아니라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생각은 후회라기보다는 자기 객관화에 가까운 흐름이었다. 그 흐름은 이렇다. 세상에 이렇게 음악을 잘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나는 타고난 역량도 부족하고 연습이나 노력에 있어서도 게을렀다. 나는 음악을 좋아했던 것이지 그렇게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사람이 모든 걸 다 잘할 필요는 없고 지금은 사업을 잘하고 있으니 그걸로 됐다. 그러니까 음악은 내 길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잘하는 뮤지션들의 음악을 즐기면 된다. 과거의 경험으로 남들보다 더 디테일한 음악의 차이를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렇게 생각을 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상담사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지적했다. 음악에서 손을 뗀 과정에서의 감정이 어딘가 말끔하지 않아 보인다며 그 얘기를 조금 더 해보기로 했다. 자세한 대화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의 상담이 끝난 후 나에게는 2가지 질문이 남았다. 첫 번째 질문은 '역량도 부족하고 연습이나 노력에 있어서도 게을렀다는 생각을 왜 하게 됐을까'였다. 그 역량과 연습과 노력의 기준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기준인가. 답은 뻔하다. 내가 짐작한 남들의 기준, 다시 말해 그냥 내가 멋대로 넘겨짚고서 만들어낸 임의의 기준이었을 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질문이었다. 역량이 부족하고 연습이나 노력에 있어 게을렀다고 치더라도, 왜 그렇게까지 아예 손을 떼었을까. 왜 취미로라도 음악을 만들지 않았을까. 왜 어느 시점부터 내 컴퓨터에는 음악 만드는 프로그램이 삭제돼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생각해 보니, 조금 처량했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그건 일종의 심한 토라짐이었다. 마치 학창 시절 첫사랑의 상처를 남긴 상대방이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평생 안경 쓴 사람은 만나지 않겠다 굳게 다짐한 마음이라든가, 어릴 때 엄마가 돈가스를 사준다고 해놓고 독감예방주사를 맞게 해서 다시는 돈가스를 쳐다보지도 않는 마음과 같이. 나는 내가 잘하고 좋아했던 음악이라는 것이 사실은 내 길이 아니었다고 단정 지으면서 애써 인정하지 않았던 큰 상처를 입었었나 보다. 그 상처를 감추기 위해 문을 걸어 잠갔던 것이다. 상담 과정에서 발견한, 먼지가 두텁게 쌓인 옛 상처였다. 



며칠 후 나는 다시 음악 프로그램을 설치했다. 시간이 많이 지나 내가 좋아하던 악기 회사에서 만든 좋은 악기들이 꽤 저렴하게 판매되고 있는 것을 보고 소프트웨어 악기를 몇 개 구매했다. 소프트웨어 시장에 구독형 판매방식이 유행하면서, 예전에는 너무 비싸서 엄두 내지 못했던 프로그램들이 꽤 합리적인 가격의 구독 방식으로 바뀌어 있는 것을 보고 몇몇 프로그램들의 구독도 시작했다. 그냥 모르는 척하고 마치 어제까지도 음악을 만들었다는 듯이 그냥 음악을 만들어봤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음악에서 손을 땐 체 지내며 알게 모르게 내 취향도 변해있었다. 물론 10년 전과 똑같이 남아있는 취향의 한 부분이나 습관들도 남아있었다. 새로운 취향과 옛 취향이 섞이면서, 내 손 끝에서는 전과는 다르면서도 어딘가 일관된 음악들이 만들어졌다. 그 음악이, 마치 10년의 인생을 더 살아간 나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잊고 있던 재미를 다시 느꼈다. 확실히 이 일은 내가 재미있어하고 좋아하는 일이었다는 감각이 다시 살아났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에서 어떤 분과 얘기를 하다가, 그분이 했던 어떤 말 한마디가 유독 마음에 남았다. 자신이 속한 부서의 업무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요즘 업무도 많고 힘드시겠다는 얘기를 했더니 그분이 이런 말을 했다. '제가 잘해야죠 뭐.' 내가 느끼기에 그 대화의 맥락은 꼭 그분이라는 한 명의 개인이 얼마나 의지를 갖고 역량을 보여주느냐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역량과 의지의 문제로 여기고 책임감을 느끼는 말로써 대답했다. 그 한마디가, 마치 내가 지금껏 나 자신에게 수없이 되풀이했던 말처럼 느껴졌다. 주변의 오만가지 일들이 다 잘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오만가지 일들을 다 내 어깨에 짊어졌구나. 그 모든 일들을 다 내 어깨 위에 굳이 올려두고 '나만 잘하면 되지'라고 생각했구나. 그러다가 번아웃이 왔구나. 


그 말이 마음 깊숙이 남은 나머지, 음악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내 삶에서 내가 가장 신경 쓰고 고민하고 있는 번아웃, 우울증, 불안장애, 공황증 상의 직접적인 배경이 된 나의 태도. 그 태도를 오롯이 담아낸 한마디. '나만 잘하면 되지.' 나 스스로가 멋대로 만들어낸 기준과, 그 높은 기준들의 벽 앞에서 스스로에게 가혹하가 몰아붙일 때 했던 그 한마디를 음악으로 만들고 싶었다. 


어쩌면 처음으로 내가 노래로 만들고 싶은 이야기가 생긴 것이었다. 음악에 있어서도 '요즘은 이런 음악이 인기가 많아', '이런 장르의 음악은 이렇게 만들어야 멋있어'라는 가상의 기준을 넘어서는 '정답'을 추구했던 예전에는 그 기준들에 압도된 나머지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찾지 못했다. 10년 가까이 음악을 하면서도 찾아내지 못한 내 이야기,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음악을 그만두고 나서도 10년이 훨씬 지나 다시 조금씩 음악에 손을 대면서 문득 찾아냈다. 


아내와 아이가 잠들고 나서, 조용한 방에서 작은 목소리로 녹음을 하고 악기들을 간단하게 연주해 녹음했다. 어렴풋이 생각했던 분위기와 느낌이 표현되도록 편곡과 믹싱 작업을 마치고, 다음날 아침 아내에게 들려주었다. 적당히 차분하고 약간은 우울한 분위기의 연주가 흘러나오며 아내가 진지하게 음악을 들었다. 그러다 '내가 잘하면 되지'라는 노래가 나지막이 나오는 부분을 들으며, 아내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고는 나를 안아주었다. 


나는 아내에게, 이 노래의 앞부분에 허밍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녹음을 하고 몇몇 악기 연주를 추가하고 노래가 완성됐다. 


그렇게 나의 새로운 음악생활, 그리고 우리 부부의 또 다른 삶의 한 부분이 시작됐다. 



- 다음 화에 계속 - 



* 이번 화의 소재가 된 곡인 니들스(The Needles)의 'Burnout'은 아래 유튜브 링크 및 각종 음원사이트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aMkZNSkI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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