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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모두 '나'라는 것을

켄 윌버의 '무경계'가 준 거대하고도 편안한 가르침 

상담을 하게 되면 머릿속에 모호하게 펼쳐져있던 생각들을 상담가 선생님의 도움에 따라 보다 명료하게 정리하게 된다. 그렇게 정리한 생각은 상담 시간 중에 내 입을 통해 말로 뱉어진다. 뱉어진 말은 다시 내 귀에 들린다. 그러면서 새로이 깨달아지는 것들이 생긴다. 나 자신에 대한 그런 깨달음들은 상담시간이 끝난 후에도 마음에 분명한 자국을 남긴다. 그래서 한동안 곱씹게 된다. 


그러다 다음 상담 시간이 되면 같은 과정을 통해 또 다른 자국을 마음에 남긴다. 마치 처음에는 아무 모양도 없이 물과 가루가 엉겨있던 모호한 덩어리를 계속 손으로 만지고 누르면  어느새 찰진 반죽이 되고, 그렇게 매만지며 어떤 자국들을 남기다 보면 그 자국들이 모여 어떤 모양을 만들어 내듯이. 상담이 진행되고 그에 대한 곱씹음이 이어질수록 조금씩 그 모양이 분명해져 갔다. 


이 모든 과정의 중심은 '나'이다. 나의 생각, 나의 느낌, 나의 감정. 나는 '나'에 대해 말하고, 곱씹고, 그 모양을 찾아간다. 내가 나 자신에게 세운 높은 기준, 이 것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나를 몰아세우고 다그치던 습관, 이 것이 반복되면서 마치 크게 꾸중을 듣고 풀이 죽은 아이처럼 잔뜩 웅크려 있던 나. 내가 외면하고 감춰두고 있던 나. 


말하자면 나에게 상담의 과정은 나 자신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이었다. 새로이 읽게 되는 책들도, 찾아보게 되는 영상자료들도 그런 내용이었다. 그렇게 '나'에 대해 집중적으로 관심을 갖는 시간이 이어지다 보니 생각지 못한 어려움이 생겼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나'인가. 지금 내가 '나'라고 일컬은 것은 어떤 '나'인가.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아주 고약한 말장난처럼 어질어질한 혼란에 빠지게 된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이드, 에고, 슈퍼에고라는 자아의 분류는 매우 직관적이어서 그만큼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이들이 참고하는 분류방식이다. 한편 전에 언급한 김주환 교수의 '내면소통'에서는 자아를 3가지로 분류한다. 경험자아, 기억자아, 배경자아. 거칠게 요약하자면 경험자아는 지금 이 순간 물리적인 행위를 하고 사고를 하고 감정을 느끼는 실존적인 자아이다. 기억자아는 과거의 경험들의 기억에서 형성된 자아이다. 배경자아는 그 모든 경험과 기억을 알아차리는 주체로서의 자아이다. 불교사상이나 인도철학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다 보면 '참나'라는 말이 있다. 진정한 자아, 참된 나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각각의 분류체계와 용어에 대한 설명을 보면 조금 난해하지만 수긍이 되고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이나 고민과 연관되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나는 나 자신을 너무 몰아세웠어'라고 한다면 몰아세운 나와 몰아세워진 나는 그 수많은 '나' 중에서 무엇과 무엇일까. 슈퍼에고가 에고를 몰아세웠을까. 기억자가가 경험자아를 몰아세웠을까. 아니면 애초에 이런 구분과 정리가 불필요한 일일까. 



어느 날 평소 깊은 대화를 자주 나누던 분으로부터 듣게 됐다. 켄 윌버의 '무경계'라는 책에 대한 얘기였다. 자세한 내용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혼란을 느끼던 시점에서 어딘가 모르게 그 혼란의 출구에 대한 단서를 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어 바로 그날 책을 샀다. 


서론의 제목이 '나는 누구인가'라니. 내 직감은 맞았다. 이 책은 정확히 내가 빠진 '나'에 대한 혼란을 정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나'와 '내가 아닌 것'의 경계를 긋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것은 내가 아닌 다른 것을 정의하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예를 들어 '포유류'의 경계를 긋는 과정에서 오리너구리처럼 애매하고 존재가 발견됐다고 할 때, 그냥 포유류로 분류하든 포유류가 아닌 것으로 분류하든 내 삶이나 오리너구리의 삶에 심각한 차이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의 경계는 다르다. 그 경계를 어떻게 긋느냐에 따라 나의 한 부분이 내가 아닌 것이 되어버릴 수도,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받아들여야 할 수도 있다. 이 것은 남들에겐 모르겠지만 나에겐 심각한 차이를 만든다. 그런 심각한 문제이니만큼, 많은 전문가들이 내가 혼란에 빠질 만큼 다양한 분류들을 심사숙고하여 정의했을 것이다.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구분하느냐에 따라 수많은 선들이 그어진다. 


집필 당시 20대였던 켄 윌버는, 이 혼란에 대해 합리적이면서도 명쾌한 해법을 제시한다. '스펙트럼'이다. 빛의 파장은 연속적으로 이어져있지만 우리가 일정한 기준으로 빨주노초파남보 7가지 경계를 그은 것과 같이, 자아의 의식은 다양한 수준을 가지고 있고 많은 학자들이 그 수준의 경계를 정의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가장 좁게 그은 경계는 저자가 '페르소나 수준'이라고 지칭하는, 의식의 가장 중심에 있는 자아이다. 그 중심까지 가는 방법은 이 질문을 계속 던지는 것이다. '이 것은 나인가, 내 것인가?' 내 옷은 내가 소유하는 대상이지 나 자신은 아니다. 내 옷을 누가 가져가거나 내가 남의 옷을 입는다고 해서 내가 남이 되진 않는다. 조금 더 확장하면 신체기관들도 그렇다. 우리가 머리카락을 자른다고 해서 자아가 축소된다고 인식하지는 않는다. 좀 더 과감하게 생각하면 팔다리도, 내장기관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정말 소중하지만 그것이 기계로 만든 보조기구로 교체된다고 해서 나라는 자의식이 없어지거나 바뀌지는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면 끝에 남는 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자의식이다. 그 관점을 아주 좁게 생각하면, 이따금씩 나의 의식적 측면을 괴롭히는 나의 무의식조차도 나를 위협하는 대상으로 인식된다. 나의 무의식조차도 배제된 가장 좁은 경계선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늘 그 좁은 경계선만을 고수하는 것은 아니다. 내 무의식, 신체는 물론 내가 갖고 있는 물건들도 자아와 동일시하여 인식하곤 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운전하다 보면 페달을 밟고 핸들을 돌리는 행위가 이 차를 나아가게 하고 내가 그 차 안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초월한 채 도로 위를 달리는 차 자체를 나와 동일시하는 느낌을 받곤 한다. 자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타인과 자식은 완전히 다르게 인식하는 차이에 공감할 것이고, 사람에 따라 그런 인식의 선이 가족, 친구, 때로는 내가 속한 사회적 집단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물론 이렇게 자아의식이 확장된다고 해서 나와 친한 타인과 나 자신을 진짜 한 덩어리의 존재라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좁은 경계선 안의 자의식을 기준으로 할 때에는 명백하게 내가 소유하는 대상이었던 내 신체기관도, 조금 다른 기준의 경계선을 그으면 자연스럽게 '나'의 울타리 안으로 가져올 수 있다. 그러하면 그 경계선을 조금 더 넓게 하는 것 또한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그렇게, 경계선을 넓히는 것을 받아들이는 단계가 지니는 의미와 기능을 상세히 설명한다. 


그렇게 경계선을 넓히는 과정의 끝에는, 심지어 온 우주를 아우르는 단계에 이른다. 경계 자체를 해체하는, 말 그대로 '무경계'이다.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이 단계를 바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책을 읽고 있던 당시의 나 조차도 이 단계를 처음 마주했을 때는 차라리 아주 공들인 농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온 우주가 나라니. 누군지도 모르는 타인들, 가본 적도 없는 공간의 땅과 공기, 어디에 어떻게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별과 그 주위의 행성까지도 다 나라니 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어떤 나무는 줄기를 뚝 잘라내어 흙에 심으면 뿌리를 내리고 잘 자란다. 이때 원래 자라던 나무와, 잘라내어 새로 심은 줄기가 자라난 나무는 같은 나무일까 다른 나무일까. 의견은 갈리겠지만 같은 나무라고 보는 것이 엉뚱하지만은 않다. 만약 이 두 나무를 같은 나무로 본다면, 우리는 한 그루의 나무에서 열린 사과들의 씨앗을 심어 수십 그루의 나무가 자라났을 때, 이들을 모두 하나의 같은 존재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조금 유연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현재 존재하는 것들의 근원을 타고 올라가면서 분리된 개체들을 거대한 하나의 존재로 보는 관점을 가져볼 수 있다. 지구상에 수없이 많은 사과 열매들과 그 열매를 맺었던 사과나무들을 거대한 하나의 '사과'라는 존재로 보는 관점 말이다. 그리고 그 관점을 확장해나가다 보면 모든 식물을 하나의 존재로, 더 나아가 모든 생물을, 더 나아가본다면 흙과 쇠와 공기까지, 그러다 보면 온 우주가 하나의 존재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조금은 느껴볼 수 있다. 



나와 온 우주는 하나라는 거대한 의식을 이해함으로써 거대한 깨달음을 얻고 우울증이 씻은 듯 나았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사실, 아무 상관도 없는 얘기다. 온 우주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얘기를 다시 한번 글로 펼쳐보는 이유는, 그렇게까지 '나'의 경계를 극단적으로 넓혀보는 시도를 해본 것이 분명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경계를 넓히고 넓혀 끝내 경계랄 것이 필요 없어지는 지경, 그러니까 온 우주가 다 나여서 경계란 걸 그을 것도 없는 지경을 받아들여 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떻게든 가까스로 그 지경에 조금이라도 다가가보니, 의도치 않았던 좋은 효과가 있었다. 계속된 '나'에 대한 탐구와 고찰 가운데 나도 모르게 촘촘하게 그어뒀던 자아의 경계선들 사이에서 헤매지 않고, 아무 때고 그 경계선들 모두를 훌쩍 넘어 이 모든 것이 결국 나 자신임을 받아들이는 일이 쉬어진 것이다. 미적분을 공부하다 보면, 미적분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1차 방정식쯤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과 비슷한 원리였다. 


'나'라는 존재는 너무도 광활하고 복잡하다. 하나씩 뜯어보면 아무리 벗겨내도 끝을 알 수 없고, 나 자신이라기엔 너무도 생소한 모습이 발견되기도 한다. 모양을 관찰하기에는 너무도 변화무쌍하다. 수많은 생명들과 거대한 파도를 모두 품고 있는 태평양처럼. 그러한 '나'를 탐구하다 보면 혼란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혼란이 조금 버겁게 느껴질 때쯤 떠올리면 된다. 그 모든 게 바로 '나'라는 것을. 




- 다음 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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