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세 라이프의 도피처
“엄마, 나 절에 들어갔다 올게”
환상과 낭만으로 부푼 가슴을 안고 대학에 입학했지만 현실은 기대와 아주 많이 달랐다. 인간관계에 대한 부침,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진로 고민, 거기에 고질적인 가족 문제까지. 내가 생각했던 대학생활은 이게 아닌데. 우울감, 무력감은 한 학기가 지나는 동안 천천히 커져 감당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냥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순 없을까, 고민하다 종강 날 엄마에게 선언했다.
“엄마, 나 절에 들어갔다 올게”
외할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1학년이던 여름방학에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는 꽤 오랜 시간 절에 머무르며 기도를 하셨는데, 할머니와 인연이 있었던 주지스님께서 절에서 일하는 것을 제안주신 것을 계기로 할머니는 60대 후반의 나이에 공양간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셨다. 워낙에 성실하고 꼼꼼한 성격 덕에 빠르게 당신의 능력을 인정받은 할머니는 내가 절을 들어가겠다 선언한 즈음에는 이미 공양간 메인셰프로 자리매김을 끝내신 뒤였다. 무려 공양간 메인셰프 수저인 내가 도피처로 절을 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회로일 수밖에.
안락한 도피처를 찾은 알량한 마음도 모르고, 할머니는 손녀를 크게 환영해 주셨다. 할머니의 당부는 단 하나, 절에서는 단정하게 긴 팔, 긴 바지를 입으라는 것. 다행히 오대산의 7월은 한낮에도 긴 팔 긴 바지를 입어도 될 만큼 서늘했다.
그렇게 절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새벽 네시 반쯤 일어나 공양간을 쓸고 닦고, 접시와 수저를 꺼내두었다. 스님과 직원들이 식사를 마치면 공양간 보살님들과 함께 아침을 먹었다. 아침 먹은 뒷정리가 마무리되면 그때부터 자유시간이었다. 나는 진부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고, 적멸보궁을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다람쥐들과 놀았다. 사무실 근처에서 와이파이가 잡힌다는 것을 우연히 안 다음에는 근처 종탑에 죽치고 앉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했다. 주에 한 번 혹은 두 번쯤은 할머니 심부름을 하러 버스를 타고 읍내를 내려갔는데, 그때는 꼭 뚜레주르에 들러 알 수 없는 의무감으로 소시지빵을 사 먹었다.
가끔은 주지스님과 차를 마셨다. 스님과의 차 회동은 할머니가 특별히 마련한 것으로, 밑도 끝도 없이 힘들다는 손녀가 조금이라도 빨리 회복되기를 바라는 할머니의 마음이 반영되어 있었다. 주지스님은 40대 후반의 큰 키에 인상이 맑은 분이었는데, 이야기를 나눠보면 때로는 우리 부모님보다도 진보적인 것이 여러모로 전형적인 스님의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았다. 나는 스님이 내어주시는 차를 마시며 가족 이야기, 학교 이야기, 알 수 없는 막연한 미래에 대해 주절주절 이야기했고, 가끔은 펑펑 울었다. 스님은 내 이야기를 들으시고 해주시는 말씀은 지금 생각해 보면 딱히 기억나지 않을 만큼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흔한 말이라도 스님이 하면 알 수 없는 힘이 있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고개를 주억거리게 됐다. 스님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출가를 하셨다는데, 산속에 살면서 어떻게 모든 것에 대한 답이 따박따박 나오는 걸까, 항상 궁금했다.
공양간을 청소하고, 스님과 차를 마시고, 소시지빵을 사 먹는 밋밋한 하루하루가 쌓여 한 달이 지나갔다. 가벼운 마음으로 절에 들어왔던 것처럼,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절을 떠나겠다고 할머니께 통보했다. 아쉬워하시며 방학이 끝날 때까지 좀 더 있다가 가지 않겠냐고 물어보는 할머니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 나는 아무래도 속세가 좋은 것 같아.”
속세 라이프는 즐거웠으나, 우울하기도 했다. 살면서 마음이 울렁거리는 순간이 오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할머니 절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는 동안 할머니는 주지스님과 함께 상원사에서 월정사로, 월정사에서 국형사로 거처를 옮겼다. 주지스님의 배려로 몇 년 전부터는 기도신청을 받으시는 법당 보살님으로 직무도 바뀌었다. 속세에 사는 나도, 절에 사는 할머니에게도 변화는 많았지만 마음이 울렁일 때마다 내가 할머니 절을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 만은 그대로였다.
작년 말, 마음이 토할 정도로 울렁거리는 시간을 보내는 중에 할머니가 계시는 원주 출장이 잡혔다. 얼른 계산을 때려보니, 출장지에서 일을 마치면 할머니가 계신 국형사에 들를 짬이 날 것 같았다.(이것을 할머니는 부처님의 뜻이라고 했다.) 나는 일이 끝나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국형사로 향했다. 할머니가 계시는 사무실을 들러 저 왔어요, 얼굴을 비추니 할머니는 부처님께 인사부터 드리는 것이 예의라며 법당으로 등을 떠미셨다.
법당은 사찰의 가장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쌀쌀한 날씨에 종종거리며 법당 안을 들어서니 따스한 나무 바닥이 날 반겼다. 나는 법당 구석에서 두툼한 방석을 꺼내다 부처님께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하며 삼배를 올리고 우두커니 그 앞에 눌러앉았다. 조용한 사찰, 해가 막 넘어가는 어스름한 낮과 저녁 사이의 시간, 사람들의 소원이 빼곡히 적힌 등과 초가 켜진 법당에 앉아 노란 조명 아래의 반짝반짝 빛나는 부처님상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니 울렁이던 마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기도도 명상도 아닌 이상한 나만의 마음 다스리기 시간, 그리고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시는 할머니.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른 내가 절을 찾는 이유다. 속세 라이프가 힘들 때, 잠시 도피하여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