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널>의 차수현, <기억>의 박태석
15년 전 사랑한 남자를 잊지 못한 여자가 있다.
모두가 잊기 시작했고, 잊어야만 했고, 잊으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15년 전 사라진 남자를 15년 동안 찾아 헤매는 미련한 여자.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이 되어버린 여자가 있다.
그리고 기억을 잃어 가는 남자가 있다.
모두가 상상조차 못했고, 상상해선 안 되었고, 자신도 상상해본 적 없지만, 불행하게도
하필 인생의 황금기에 알츠하이머 선고를 받은 가여운 남자.
정점에 올랐다고 여겼을 바로 그때 모든 것을 잃게 될 처지에 놓인 남자가 있다.
웬만한 남자들도 버티기 힘들다는 험한 범죄판에서 수년을 형사로 버텨오며 단련된 탓인지
좀처럼 우는 모습도 웃는 모습도 보여주지 않는 차수현(김혜수 분).
하지만 그런 여자를 울고 웃게 했던 기억 속의 한 남자가 있다.
15년 전 울기도 웃기도 잘하고 어리바리한 신입이었던 수현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첫사랑,
선배이자 직장 동료였던 이재한(조진웅 분) 형사.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제대로 이야기도 못해보고 끙끙 앓기만 하다가 갑자기 이별해야만 했던 사람.
‘실종’ 상태로 이미 15년이나 흘렀지만 수현은 15년 동안 변함없이 재한을 기다린다.
이제 그만할 때도 되었다며 말리던 주위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그때 일을 언급하지도 않는다.
모두에게 잊혀 가고 있는 것이다.
3년도 5년도 10년도 아니고, 15년 동안 한 남자만을 바라본다는 것이 가능할까?
게다가 사실상 이미 죽었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어떻게 15년 동안 하루도 잊지 못하고 바라보며 기다릴 수 있을까.
'15년'이라는 숫자를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정말 저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사랑한 이재한 형사, '이재한'이라는 남자가 등장하고 나서 그 생각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저런 남자라면, 15년 동안 잊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그리고 차수현이라는 여자라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충분히, 잊지 못할 남자이고, 또 절대로 잊지 않을 여자다.
타고난 배경도, 엄청난 학벌도, 대단한 빽도 없었지만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잘 나가는 변호사가 된 박태석(이성민 분).
비록 정의를 위해 싸우는 변호사도 아니고,
본인도 본인 입으로 내가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라고 말하는,
잘 나가는 만큼 사방에 적도 많은 ‘속물’ 변호사이지만
그래도 힘들었던 과거를 딛고 지금은 모두에게 인정받으며
좋은 집에서 든든한 가족들과 함께 나름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인생의 정점에 서있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알츠하이머’ 판정.
앞으로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게 될 것이라는 충격적이고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
변호사에게 알츠하이머라니...
지금까지 정의마저 버리고 죽어라 쌓아온 권력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나만 바라보는 우리 가족들은 어떡하지?
그런데 기억을 잃어갈수록, 자꾸만 선명해지는 과거의 기억이 있다.
그가 절대로 기억을 완전히 잃어서는 안 될 이유, 뺑소니 사고로 잃고 만 아들 동우.
공소시효가 지났지만 아직 뺑소니 범은 잡히지 않았다.
애써 잊은 척하며 살아왔지만 사실 그는, 한순간도 죽은 아들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기억을 잃고 지금 가진 것들도 잃게 될 것이란 걸 받아들이고 나니,
과거에 행했던 후회되는 일들이 마구 떠오른다.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겠다. 더 이상 후회할 일을 만들 시간이 없다.
기억을 잃기 전에, 전부 바로잡아야 한다.
<시그널>과 <기억>, 전혀 다른 듯 보이는 두 드라마.
그리고 닮은 구석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차수현이라는 여자와 박태석이라는 남자.
하지만 두 드라마 속 각 주인공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정의를 위해 싸운다’는 구태의연한 이야기?
그것도 맞다. 하지만 그보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정의를 위해 싸우기 시작하면 얼마나 힘든지’ 그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주인공 모두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들 때문에
‘정의를 위해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고,
그렇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갈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들도 날 때부터 정의로운 사람으로 정해져 태어나지는 않았다는 것.
결국 인간은 모두 ‘어쩔 수 없는 각자만의 사정’에 의해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그들은 포기할 수 있다. 정의 대신 다른 것을 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정의를 위해 싸우기 시작한다.
15년 동안 잊지 못하고 기다린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
기억을 잃어 가는 중에도 선명히 떠오르는 사랑했던 아들을 위해서.
사람들은 드라마에서라도 현실에서 이뤄지지 못한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주인공을 응원한다.
그들이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을 보며 희망을 얻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사실 모두가 결국에는 ‘사랑’을 믿고 있기 때문에 드라마에 공감하고,
또 그들을 응원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삭막한 현실 속에서도 사랑은 존재하고 있다는 것.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잃어서는 안 될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며,
세상에 쉽게 잊혀도 되는 존재는 없다는 것.
정의도, 희망도, 결국에는 모두 ‘사랑’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시그널>과 <기억>이라는 드라마를 보고, 주인공들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두 드라마는 진부한 스토리를 진부하지 않게 풀어내면서,
알고 보면 ‘진리’는 본래 진부할 수밖에 없는 것이란 깨달음도 얻게 한다.
예상을 넘어 대박 시청률로 종영한 <시그널>의 후속작 <기억>은
전작보다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서 실패한 것이 아니냐는 평가도 받고 있다.
물론 <응답하라 1988>부터 이어진 tvN 드라마 전작들의 시청률 대박에 비하면 저조한 시청률을 내고 있지만, <기억>은 훌륭한 대본과 세련된 연출, 배우들의 연기력까지 3박자를 고루 갖춘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기억하지 못할까 봐 아쉬운 마음이 생길 정도다.
<기억>은 이제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
과연 박태석은 기억을 잃기 전에 잘못 엉킨 실타래를 풀어낼 수 있을까.
그리고 문득문득 <시그널>의 차수현이라는 여자를 생각한다.
15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남자만을 기다린 여자는, 그동안 얼마나 많이 혼자 울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