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청춘들의 불안을 먹고 활활 타오르는 영화적 불씨.
(스포성 글이 있습니다.)
배용균 감독을 제외하고 지난 20여 년간 단 6편의 작품을 만들고 한국영화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은 이창동 감독 밖에 없을 것이다. 장르적으로 시작한 '초록물고기'의 성공 이후 다른 방향으로 선회해 오로지 진짜를 만들고 진짜를 보여주려고 했던 이창동 감독은 진정한 리얼리즘의 장인이라 할 수 있다. '박하사탕'은 이제 고전의 반열에 올라 한국 근현대사를 떠올릴때 반드시 들어가는 영화가 되었고, '오아시스'에서는 이전 한국영화에서 본 적 없는 러브스토리를 남겼으며 '밀양'과 '시'는 영화가 어느 정도까지 깊어질 수 있는지 발견하게 해주었다. 그럼, 8년 만에 나온 신작 '버닝'은 어떤 영화일까.
원작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를 가져온 이창동 감독은 그 각색 방향이 실로 흥미롭다. 원작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30살 소설가를 20대 중 후반 작가 지망생 청년으로 바꿨다는 점이다. 원작의 뼈대는 가져오되 작품의 방향은 한국의 상황에 맞게 고쳤다고 볼 수 있는데, 원작 '헛간을 태우다'와 '버닝'이 공유하고 있는 지점이 있고, '헛간을 태우다' 이전에 나온 윌리엄 포크너의 '헛간 방화'와도 공유하고 있는 지점이 있다. 이 영화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을 가져오긴 했지만 그 세계관이 윌리엄 포크너와도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프닝에서 부터 종수(유아인)의 어깨에 짐을 옮기며 시작하는 '버닝'은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는지 짧막하게 스케치 해주는 장면일 것이다. 오프닝 크레딧이 뜨면 씨스타의 'Touch My Body'가 흘러나오는 것은 허우 샤오시엔의 '남국재견' '밀레니엄 맘보'에서 나온 테크노 음악처럼 이창동 감독의 시선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를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허우 샤오시엔이 대만의 근대사에서 현대로 넘어온 것 처럼 이창동 감독은 대한민국 지금 세대, 현대의 청년들에게 눈을 돌리며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또한 메타포들이 다양한 암시를 하고 있을 뿐 답을 제시하지 않고 내용 자체가 모호하게 진행된다. 이는 이창동 감독의 '버닝'또한 엄청난 동력으로 사용이 되는데 '헛간을 태우다'가 단편소설이긴 하지만 그 에너지로나 표현으로나 원작 소설보다 더 깊게 풀어낸다. 이 영화에서의 미스터리는 앞길을 전혀 알 수 없는 불안함에서 오는 감정이기에 관객뿐만 아니라 극중 종수에게도 포함되는 미스터리이다. '버닝'에서 이창동 감독이 펼쳐내는 세계의 작동모토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종수와 해미는 몇 십년 만에 우연히 만나게 되고 해미의 집까지 찾아가게 된다. 해미의 집에 방문하게 되면서 해미는 흥미로운 말을 꺼내는데 창문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는 것을 이야기하게 된다. 원래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집이지만 특정 시간이 되면 남산타워에 반사되어 해미의 창문을 통해 햇빛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들어오는 그 햇빛은 아주 잠깐 머물다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종수에게 해준다. 그리고 둘은 섹스를하고 그 햇빛을 종수는 응시하며 시퀀스가 끝나게 된다. 별 의미없어 보이던 이 장면은 종수가 고양이 밥을 주기 위해 집 방문을 하기 시작하며 여러번 반복된다.
'버닝'에 나오는 메타포들은 보이거나 없어졌거나, 실체가 있었거나 없었거나,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거나로 나뉘어 진다. '시계' '우물' '고양이' '판토마임' '엄마' '아버지' '햇빛' '노을' '비닐하우스' 등 메타포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고 온갖 추측을 난무하게 한다. 중요한 것은 메타포들의 의미일까, 아니면 메타포들 자체일까. 이 영화에서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전달되는 정보는 종수의 집에 흘러나오는 뉴스내용 뿐이다. 그 뉴스의 내용은 청년 실업이 OECD 국가 중 가장 빠른 속도로 역주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해미는 종수에게 여행 도중 만나게 된 '벤'이라는 남자를 소개해 준다. 극 중에서 벤과 해미 종수가 갖게되는 기묘한 관계 역시 흥미롭게 다가오는데, 철저하게 종수와 벤은 대비가 되고 있으며 더 중요한 것은 벤의 직업이 무엇인지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무역을 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그냥 놀아요. 노는거랑 일하는거랑 구분이 잘 안되요'라며 말한 벤을 보며 종수는 상당한 괴리감을 느끼게 된다. 벤의 집에 방문해서 해미와 담배를 필 때 '저 남자 너 뭐가 좋아서 같이 다니는 것 같애?'라며 물어보는 것도 종수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 뿐이다.
벤과 종수가 행하고 있는 여가도 완전히 다르다는 점에서 괴리가 느껴진다. 극 중 벤은 요리를 하거나 친구들과 분위기 있는 만남을 하는 반면 종수는 한 번씩 들르는 해미의 집에서 남산타워를 바라보며 자위하는(혹은 할 수 있는)것 밖에 없다는 점이다. 해미의 집에서 남산타워를 바라보며 자위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생각해볼 거리가 있다.(그리고, 벤과 해미 종수가 함께간 모임 장소 안에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검은 개의 정체도 필자에겐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벤이 해미와 같이 요리를 하며 메타포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도 종수는 멍하게 바라보며 벤이 아닌 해미에게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어본다. 화장실에 오줌을 누고 나서 세면 서랍장 안에 놓여진 여자들의 물건을 보고 단순히 바람둥이라고 생각했을 종수는 극이 진행 될수록 '벤'의 정체에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끼게 된다.
곱창전골집에서의 해미 이야기도 의미심장하게 들어볼 필요가 있다. 이전에 해미는 종수에게 한 번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며 해가 서서히 없어지는 것을 디테일하게 묘사하는데, 처음에는 주황색이었다가 빨간색으로 변하고 그러다 남색으로 변했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사라진다는 이 이야기는 벤과 해미가 종수의 집을 찾아가는 것과 극 종반 해미의 행방에 관한 설명으로도 연결된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깊게 다뤄지고 있다.
그렇다면, 벤은 정말 해미를 죽였을까, 벤은 지금까지 여럿 여자들을 죽여온 것일까, 벤이 말한 비닐하우스의 의미는 정말 해미였을까, 해미는 정말 불에 탄 것일까, 여러 가지 질문들이 쏟아진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들의 답보다 질문을 던지는 방향과 행위자체가 '버닝'에서는 중요하다. 이는 다시 예술의 질문 방향과도 고스란히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흥미롭고 탁월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해결과 해답이 아니라 종수 마음 속에 빗발치고 있는 알 수 없는 응어리들이다.
극 중에 나오는 '해미'와 '벤'은 형상화된 존재처럼도 보인다. 그런 생각을 갖게 하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종수가 꿈을 꾸는 장면일 것이다. 벤이 비닐하우스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그 상황을 종수가 비슷하게 꿈을 꾼다. 어렸을적 아빠의 분노로 인해 도망간 엄마는 아빠의 지시로 엄마의 옷들을 불에 태워버렸다는 이야기를 벤에게 해주게 되고 그 두 가지가 기묘하게 섞인 꿈을 종수는 꾸게 된다. 그 꿈은 어린 종수가 윗옷을 벗고 비닐하우스 타는 장면을 웃으며 보고 있는 꿈이다. 이 장면은 해미가 옷을 벗으며 춤추는 장면과 극 엔딩에서 펼쳐지는 종수의 행동과도 다시 기묘하게 섞이게 된다.
다른 하나는 꿈인지 꿈이 아닌지 모호하게 표현이 된다. 바로 종수와 벤, 벤과 종수 서로가 서로를 추격하는 듯한 자동차 씬인데 이 시퀀스는 종수가 잠에서 깨어나며 끝나게 된다. 마치 꿈을 꾸고 있었던 것처럼 묘사 되는 이 장면은 그 다음 장면이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받고 엄마를 만나러 가게 되는 장면이라는 것이다. 몇 십년 만에 만나게 되는 엄마와 그 이전에 벤을 쫒던 씬과는 사실상 매칭이 잘 되지 않는다. 씬과 씬을 거의 충돌 시키다 시피 하는 이창동 감독의 연출은 벤과 종수가 서로 충돌한 것과 같은 느낌을 고스란히 전달받게 된다. 종수가 벤을 추격하는 이 이상한 시퀀스는 그 자체로도 대단한 서스펜스를 보여주는데 느리고 부피도 엄청난 이 트럭을 가지고 만드는 서스펜스가 생각보다 상당하다(감정적으로는 완전히 다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김기덕 감독의 '사마리아' 엔딩이 생각나기도 한다).
종수와 벤, 종수와 해미의 관계가 이 영화의 중심 축이면서도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지만 사실, 종수와 아버지의 관계 역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 지점에서 윌리엄 포크너의 '헛간 방화'와 기묘하게 연결이 되는데 이 소설은 아버지가 세상에 대한 분노를 남의 헛간을 태우면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들의 세대로까지 이어지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있다. 말하자면, '박하사탕'에서 도저히 괴로워 몸부림 치며 다시 돌아가려고 했던 '영호'가 끝내 자기 자신에게 큰 분노를 터트리며 시작했던 그 영화는 지난 20여 년 가까이 종수의 세대로까지 이어져 왔지만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인 상태이다. 분노조절 장애를 가지고 있는 이전 세대의 아버지는 고스란히 아들에게 전이시켜 그 분노를 터트리는 영화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버닝'에서 종수가 태우고 있는 것은 외관상 벤과 벤의 차 이지만 세상을 향한 분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태우는 분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해미의 행방이 묘연한 것 벤의 정체가 불투명한 것 종수의 마음 속엔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불안한 마음들이다. 그 불안한 마음들은 이내 스스로가 참지 못하고 방화하며 활활 불태운다. 종수가 자신이 입은 옷까지 방화를 하고 나체로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전종서, 스티븐 연은 이창동 감독의 세계에서 완전히 새롭게 선보이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재미교포 배우와 톡톡튀는 발랄한 여배우는 이창동 감독의 작품에서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물이 그 세계에 고스란히 녹아들기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특히나 이창동 감독의 작품에서는 쉽지 않았을 것인데, 제 역할을 똑똑히 해줌으로써 인상적으로 비쳐진다. 전종서는 '박하사탕'에 처음 얼굴을 선보였던 문소리 만큼이나 인상적인데 문소리같은 거대한 배우가 될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보아야겠지만 충분히 잠재성을 가진 배우로 보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유아인의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발산하는 연기들이 많았다면 '버닝'에서는 내내 '베이스'안으로 수렴시키는 듯한 연기로 작품 전체를 사로잡고 있다. 내내 수렴만하다 엔딩에서 순간적으로 터트리는 그 에너지는 연출적인 측면에서도 대단하고 연기적인 측면에서도 대단하다. 청춘, 청년의 얼굴을 유아인이라는 배우가 가지고 있기에 이 작품에서의 이 역할이 더 절절하게 다가오는 경향도 있다. 칸 현지에서도 유아인의 연기에 호평을 하고 있는데 그 호평만큼이나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연출만큼 인상적인 것은 홍경표 감독의 촬영이다. 이미 나홍진 감독의 '곡성'에서 그 무시무시한 자연과 공간을 탁월하게 잡아내었던 홍경표 감독은 나홍진 감독과 맞먹을 정도의 집념이 있는 이창동 감독의 작품세계 또한 무척이나 탁월하게 잡아낸다. 영화의 눈이자 곧 감독(창작자 혹은 예술가)의 눈이기도 한 카메라는 자연을 담아내는 숏들을 소름끼치도록 아름답게 잡아낸다. 이 영화의 미학적 완성도가 가장 훌륭한 종수의 집에서 담아내는 노을이나 밤의 풍경 특히, 주황색 빨간색 남색 그리고 검정색을 다 담아내는 집념은 가히 대단하다(홍경표 감독도 대단하지만 이걸 한달동안 촬영한 이창동 감독이 더 대단하다). 그 외 종수가 동네를 뛰어다닌 씬이나 종수와 까마귀가 프레임에 같이 잡히는 씬 또한 대단하다(하늘의 색깔도 중요했을 것이다).
'버닝'은 이창동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전작들과는 또 다른 도약을 내딘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뉴스를 활용하는 방식은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가 떠올려지고, 분노를 표출하는 엔딩 씬은 지아장커의 '천주정'이 떠올려 지기도 한다. 작품의 전체적인 시선과 이야기는 허우 샤오시엔이 현대와 현대의 청춘으로 옮겼던 '남국재견'과 '밀레니엄 맘보'가 상당히 오버랩 된다. 종수가 해미의 집에서 글을 쓰는 모습을 안에서 서서히 줌인으로 잡다가 갑자기 창문 바깥으로 옮겨 서서히 줌아웃 하는 장면은 이 시대 청춘들의 모습이 어떻게 확장되고 있는지를 탁월하게 묘사한다. 그 프레임의 모서리에는 남산타워가 있다는 것도 상당히 중요할 것이다.
해미가 종수에게 '고양이를 부탁해'라고 한 것은 말 그대로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가 자연스레 떠올려지기도 한다.('버닝'과 비교해)'고양이를 부탁해'가 좀 더 말랑말랑하고 순한 느낌의 청춘영화 였다면,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제목 그대로 활활 타오르는 영화일 것이다. 아버지의 세대보다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형체를 알 수 없는 현대 청춘들의 그 불안은 이윽고 잠식되어, 불안은 곧 분노로 바뀌게 되고 그 분노는 알 수 없는 내면의 응어리에다 불을 지르게 된다.
배용균 감독처럼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제작이나 기획단계에서만 보이던 이창동 감독이 이제 메가폰은 영영 잡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었던 것이 사실이다. '시'이후 8년 만에 나온 '버닝'은 마치 젊은 감독이 만든 것 같은 에너지로 영화적 불씨가 활활 타오르는 젊은 영화이다. 배용균과 이창동이 '대구'출신이라는 점 말고도 비슷한 점은 많이 있다. 부디, 배용균 감독의 영화적 자취처럼 사라지지 않길 바라는 염원으로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하루 빨리 다시 볼 수 있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