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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리 Jul 17. 2024

여름엔 콩국수죠

소금 or 설탕


콩국수 맛을 제대로 알았던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시골에 살던 어릴 적 여름이면 엄마는 손수 콩을 갈아 콩국수를 만들었다. 채 썬 오이가 소담히 올라가 있는 콩국수를 볼 때면 여름이 왔구나를 실감했던 것 같다. 주말 점심 메뉴로 콩국수가 등장하면 아빠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서둘러 젓가락을 들었다. 반면 우리 삼 남매는 자동으로 '에잇'하며 실망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소금을 팍팍 넣어 짠맛으로 억지로 국수 한 그릇을 비워내곤 했다.


둘째를 낳고 동네 영어학원에서 일할 때였다.


화요일 오전마다 선생님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선생님들과 각자 맡은 아이들의 상황을 브리핑하고 함께 고민하는 시간이 좋았다. 이렇게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진심인 학원도 있구나라는 마음에 학부모로서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다. 무엇보다 회의가 끝나면 함께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이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10명이 안 되는 적은 인원이었지만, 모두의 기대를 한 메뉴로 통일시키는 것은 잔혹한 일이었다. 결국 우리는 여러 메뉴를 골라 먹을 수 있는 김밥천국 같은 분식집을 자주 갔다.


자고로 맛집은 한 메뉴만 쭉 파는 외길 고집에서 빚어진 맛임을 알기에 엄청난 맛을 기대하고 갔던 식당은 아니었다. 맛집은 각자 데이트나 가족과 외식할 때 갈 수 있으니, 우리끼리는 지금 딱 떠오르는, 먹고 싶은 그 메뉴를 고를 수 있는 종합메뉴 식당을 선택한 것이다. 식당 이름이 00 만두였던 곳이었다. 만두를 가게 이름으로 지을 만큼 만두가 들어있는 메뉴가 주력이었겠지만, 그 외에도 참 다양한 메뉴가 있었다. 심지어 자장면과 탕수육도 있던 식당이었다.


그날도 이런저런 고민 끝에 그 식당으로 가기로 했다. 한 여름으로 진입하기 직전이었던 것 같다. 식당으로 가는 내내 서로 무엇을 먹을지 치열한 공방을 이어갔다. 오늘은 기필코 자장면을 먹어보겠다는 이도 있었고, 만두집에서 아직 떡만둣국을 못 먹어본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 그것을 먹겠노라 말하는 이도 있었다. 이 메뉴를 말하면 그것이 먹고 싶었고, 저 메뉴를 말하면 그것이 먹고 싶어지는 우유부단함으로  한도 없이 흔들린 채 식당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펼치는데 <여름메뉴 출시-콩국수>가 쓰여있었다. 콩국수라 하니 이제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된다는 실감이 들었다. 보자마자 바로 '이거다'란 생각이 들어 메뉴판을 한 장 더 넘겨보지도 않고 콩국수를 시키기로 정했다. 평소와 다르게 곧장 메뉴를 정한 나를 보더니 원장님도 고민하지 않고 같이 콩국수를 먹겠다고 했다. 옆에서 원장님의 아내이자 부원장님이 조심스레 '만두집에서 콩국수라니, 괜찮을까요?'라고 물었다. 보통 선생님들이 메뉴를 이것저것 시켜서 허물없이 서로 조금씩 나눠먹곤 했으니 옆지기가 콩국수를 선택한 것이 자신이 먹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 오는 걱정인지, 순수한 염려인지 알 수 없었으나 일리 있는 의견이었다. 원장님은 고민하는 듯했으나 나는 흔들림 없이 콩국수를 고수했다. 결국 원장님도 그걸 먹겠다고 굳은 심지의 표정으로 말했고, 모두가 메뉴를 정하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다. 역시 오는 길에 열심히 고민했던 것은 다 쓸모없는 짓이었다. 식당을 들어오며 풍기는 냄새, 옆 테이블에서 먹고 있는 음식, 그리고 메뉴판을 보면서 즉흥적으로 고민하는 것들이 합쳐져 본디 자신이 원했던 것은 잊은 채 각자 다 엉뚱한 메뉴를 주문했다.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하랴.


"선생님도 콩국수를 좋아하나 보네요."

내 앞에 앉은 원장님은 콩국수를 기다리는 그 짧고도 긴 시간에 물어왔다. 그 말에는 자신은 콩국수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함께 전하고 있었다. 질문 같지 않지만 대답을 요하는 말에 '내가 콩국수를 좋아했나'를 생각해 봤다. 좋아하는 음식을 생각하고 나눌 기회가 있을 때, 단 한 번도 콩국수를 떠올려본 적은 없었다. 콩국수란 메뉴를 일단 좋아하는 음식 후보에 넣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저 으레 여름이 오면 늘 함께 오는 콩국수를 이쯤에는 먹고 가야 할 것 같은 의무감 같은 것이랄까. 여름을 대하는 나만의 의식이라고 할까나. 뭐 그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미 콩국수를 시킨 내가 그 메뉴를 싫어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 거창하게 대답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막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애매해서 한참 뜸을 들이다가 '그런 것 같아요'란 이상한 대답으로 얼버무렸다. 원장님이 그 질문을 한 것은 그 이후 질문을 던지기 위한 포석이었음을 바로 알았다.


"그럼 소금을 넣어요, 설탕을 넣어요?"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다시 되물었다.

"설탕이요? 콩국수에 설탕을 넣기도 하나요?"

내가 이렇게 묻자 옆에 있던 부원장님이 반갑다는 듯이 내 말을 확 낚아채며 말했다.

"그죠! 나도 이 사람이랑 결혼하고 처음 알았어요. 순천에서는 콩국수에 설탕을 넣더라고요!"


원장님은 어릴 때부터 설탕을 잔뜩 넣은 콩국수를 좋아했다고 어린아이처럼 잔뜩 들뜬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 사람은 어릴 때부터 콩국수를 좋아해서 지금까지 먹고 있구나란 생각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난 어릴 때 여름이면 먹었던 콩국수를 좋아했던 적은 없는데 여전히 여름이면 먹고 있다는 생각도 하면서 말이다. 음식이란 것이 어릴 때 맛있게 먹어서 계속 좋아하는 경우도 있지만, 내 남편은 어릴 때 물리도록 자주 먹었던 고등어조림이 싫다고 말하기도 했다. 음식을 좋아하는 것에 어떤 법칙이 존재할리 만무하다. 단순히 어릴 때 좋아하고 싫어했던 것을 넘어서 자라오는 과정 중에 여러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각자 나름의 추억과 취향이 버물어진 그 무엇인가가 '좋아하는' 것에 근거를 마련할 테지.


나는 여전히 여름이 되면 콩국수가 생각난다. 초딩 입맛이었던 남편도 신혼때는 결코 먼저 찾는 메뉴가 아니었던 것을 지금은 꽤 반갑게 먹어준다. 고등어조림도 이제는 잘 먹고, 청국장이나 가지 요리도 무척 좋아해 주니 결혼이라는 것이 사람 입맛을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엄마가 해준 음식에는 투정했으나 감히 아내가 해준 음식에 그럴 수 없어 먹다 보니 좋아졌을 수도 있다. 이제 남편도 여름이 가까워지면  먼저 콩국수 먹으러 가자고 말해준다.



재택근무를 하는 남편과 집 근처 유명한 콩국수 집에 가기로 했다.


일반 콩국수가 아니라 크림 콩국수라 하는 곳이다.  분명 콩과 간수 이외에는 그 어떤 첨가물도 들어가지 않았다는데 어찌 그런 걸쭉하고 부드러운 크림 질감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여기야말로 한 메뉴만 있으며 영업시간도 딱 11시부터 3시까지만 하는 곳이니 진정한 맛집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재료 소진으로 2시 전에 끝나는 날이 부지기수다. 해가 길수록, 여름이 길어질수록 이곳 웨이팅 시간도 길어진다. 오늘은 무려 1시간 10분을 기다렸다가 콩국수를 먹을 수 있었다. 비교적 회전율이 빠른 국숫집에서 이 정도 웨이팅이면 말 그대로 문전성시다.


콩국수는 어른이 되면 모두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신비한 메뉴인지도 모르겠다. 콩국수를 먹었으니 본격적인 여름의 무더위도 단호히 맞설 수 있을 것만 같다. 여름이 되면 엄마가 부지런히 콩을 갈아 콩국수를 만들어준 이유가 있는지도 모른다. 든든히 건강한 단백질로 몸을 채워 이번 여름도 잘 지나가라는 무사 염원을 담아 만들었던 것을 아닐는지.


우리 집 아이들에게 콩국수를 먹자고 하면 어릴 때 나처럼 '으악'하며 질색하는 표정으로 응수한다. 이 아이들도 커서 어른이 되면 어른의 맛, 콩국수를 좋아하게 되려나. 아님 지금이라도 콩국수에 설탕을 잔뜩 넣어 주면 좋아할 수 있을까. 남편과 둘이서만 콩국수를 먹고 오면서 밀려오는 고민이다.



크림콩국수, 한번 먹으면 빠져나오기 힘든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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