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이해> 그리고 <무화과 숲>
이럴 줄 알았다. 보고 나면 이렇게 긴 여운에 가슴이
요동치고 마음이 타격을 받을 걸 알고 있었다.
<사랑의 이해>의 이해가 understanding이 아니라
interests라는 걸 알았을 때
새드엔딩을 예감했으면서도 나는 상수와 수영처럼
내가 놓쳐버린 선택들과 그리고
이해관계를 따져 한 모든 선택들을 떠올리며 이걸 보고 있다.
이성을 만난다면 절대로 은행원과 학교 선생님은 만나지 말아야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나지만
은행이라는 공간도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사실 어떤 상황과 어떤 공간이 그 감정 - 끌림, 사랑 - 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다만 말할 수 있는 사랑과 말할 수 없는 사랑만이 있을 뿐.
어찌할 수 없이 끌리면서도, 또 오랜 시간을 공들여
마음을 쌓아왔으면서도
스스로의 마음을 외면하고 귀를 닫은 상수와 수영이 제일 잘 알고 있다.
자기가 정말 원하는 사람이 지금 내가 선택한 이가
아니라 시선 너머의 저 사람이란 걸.
매일, 매순간 아무렇지 않은척 대하려고 노력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란 걸.
눈앞에 있다
가질수도 있었던 사람이
그러나 놓쳐 버린 사람이
쳐다보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다
날 선택해준 마음을 지키기 위해
내가 선택한 마음에 책임지기 위해
바라보지 않는다
또다시 원하게 될까봐
마음을 속이지 못하게 될까봐
수영과 상수가 교차로 독백하는 이 대사가 너무 마음이 아팠다.
처음엔 수영의 집안 배경과 미경이라는 인물의 철없는 해맑음이 마치 연출자가 이 서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억지로 갖다 붙인, 사랑을 저해하는 이해관계를 납득시키기 위해서 과하게 설정한 것 처럼 느껴졌다. 작위적 흙수저와 작위적 금수저 같아서. 그러나 어쩜 흙수저도 금수저도 아닌 중간 계급의 내가 모르는 극단적 계급차이가 사랑을 방해하는 세계는 분명 현존하겠구나 싶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충실할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일에 충실할 것인가.
사랑하니까 사랑할 것인가, 사랑해도 장애가 없을 만한 사람을 골라 그 만큼의 감정에 충실할 것인가.
인류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갖고 있는 한
영원한 딜레마가 아닐까.
돈과 일상의 무게는 때론 사랑보다 무겁고
사랑에 대한 결핍은 때론 돈보다 지독하니까.
수영이란 인물. 타고나길 우아한 영혼을 갖고 태어난 귀족적 여인.
가난과 동생의 죽음이라는 불행만 아니었다면 그 무엇에도 자신의 사랑을 포기할 이유가 없었을 인물.
그림에도 음악에도 가드닝에도 재능이 있는 차분한 성품과 서늘한 미소를 가진 아름다운 인물.
좋아하는 와인과 커피 취향이 분명한 사람.
그러나 그녀가 하나하나 일군 일상의 가치가 계급적 위계 속에서 너무나 쉽게 아무것도 아닌게 돼버리고 마는
현실. 미경이 부모의 돈이 아니었다면 일구지 못했을 것을 수영이 일구어 놓았다 한들
그건 그냥 발버둥처럼 보이니까.
수영도 그걸 알고 있으니까.
중반을 지나고 있는 <사랑의 이해>를 보며 나는 문득 황인찬의 시 <무화과 숲>을 떠올렸다.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들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니 그 어떤 감정이
나를 짓누르는 순간에도
살아내야 하는 일상이 그 감정보다 언제나 더 무겁다.
쌀을 씻어서 아이에게 먹이고,
아픈 아이에게 약을 주고,
그러다 문득 주방 창 너머에 숲을 보며 떠올린다.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어느 연인 하나가
몰래 도망쳐 저 숲으로 들어가 버린 건 아닐까. 아니 그런일이 한 번쯤은 있었던 일이면
좋겠다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고작 밥을 짓고 잠을 자고 그러다 꿈을 꾸는게
전부라 해도. 어쩌다 꾼 백번의 꿈 중에서 단 한번은 안 혼나고 실컷 사랑하는 꿈 정도만은
허락되기를 바라면서.
나는 미경과 종현이 더 상처 받기 전에,
어색한 노력들과 혹시나 상대가 떠날까 하는 전전긍긍 속에서 더 다치기 전에
상수와 수영이 찰나 뿐이라 할지라도 사랑하기를 바란다.
소설의 결말이 새드엔딩이라는 스포를 이미 읽었지만
아무렴 꿈은 꿀 수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