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지 못하는 진심
또, 그때와 같은 말이었다.
카페에 앉아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정수리에서부터 뻗은 갈색 머리가 어깨 끝자락으로, 팔뚝으로, 그리고 나에게로 다가올수록 조금씩 옅어지는 것 같았다. 얼마나 먼 길을 돌아갔던 것인지, 그것은 우리의 아득한 거리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서서히 흐려졌다.
너에겐 정말 차갑고 하얀 벽이 있는 것 같아,라고 그녀는 말했다.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던 나는 잠깐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어떠한 말도 함부로 뱉을 수 없어서, 식탁에 놓인 아메리카노로 시선을 돌렸다. 희뿌연 김이 모락모락 올라와 우리 사이를 하얗게 갈라놓는 것 같았다. 커피는 아주 빠르게 식어갔고, 나는 그것에 함부로 손가락을 갖다 대지 못했다.
그렇군요,라고 나는 짧게 대답했다. 잠깐 흐르는 정적에 괜스레 옅은 미소가 올라왔다. 이 사람도, 이전의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인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또 누군가를 상처 입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적당히 처음 들어보는 말인 것처럼, 마치 그 사람이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마음이라도 들게끔, 적당한 말을 덧붙였다.
「왜 그렇게 느꼈을까요.」
「글쎄. 그냥 네 속을 잘 모르겠어.」
「속을 모르겠다고요? 저는 감춘 게 없는데.」
「…….」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녀와 거리를 두긴 했었다. 지금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을 거리에서, 단순한 너와 나로 존재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저 아는 사람, 조금 더 아름답게 이야기하면, 언제든지 친해질 수 있는 관계. 그래서 나는 그녀를 항상 한결같이 대하려고 노력했다. 엄청 친절하지도 엄청 무관심하지도 않게끔. 심지어 나는 그녀의 미운 점을 다른 사람에게서 듣고도 한 번도 그녀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다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미운 사람이 되었을까.
순간적으로 나는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걸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사람의 마음을 잘 믿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특히 이성 관계라면 더더욱. 나는 어렸을 때부터 소심한 사람이었고, 확실한 것이 아니면 절대 모험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불확실한 것이었다.
나의 이런 태도는 어렸을 때부터 형성됐다. 초등학생 시절 함께 마법사 놀이를 했던 한 친구는 알고 보니 뒤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쟤는 유치하게 그러고 논다’라며 뒷말을 했다. 그리고 같은 반이었던 한 여자아이는 학년이 올라가고 나자 나의 인사를 받아주기는커녕,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무시했다. 그렇게 그날 그 아이에게 들었던 나의 손은, 내가 느낀 모멸감만큼 허공을 어색하게 맴돌았다.
조금 더 커서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학원에서 의도적인 따돌림도 당했다. 당시 조용히 앞자리에서 공부만 하고 말주변이 없었던 나를 싫어하는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친구는 점심시간에 인상을 찌푸리며 내게 따라오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래도 나는 조금 용기를 내어 그 아이와 친해지고 싶었지만, 그는 오히려 나를 우습다는 듯 바라보며 그의 무리와 시시덕거렸다.
그 이후 고등학생 때부터 나는 내 모습을 점차 감췄다. 타인에게 깊은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고, 피상적으로 사람을 만났다. 그러면서 순수한 진심을 표현하는 방법을 잃어버렸고, 아무 생각 없이 공부를 했다. 학교와 학원의 짜인 루틴대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더 편했다.
대학교에 가서도 크게 변한 건 없었다. 나는 여전히 소심한 사람이었고, 눈치가 없었고, 관계에 서툴렀다. 어느 날 친해졌다고 생각한 선배에게는 카톡으로 장난을 치다 쌍욕을 먹었다. 소개팅에 나가서는 항상 대차게 까였다. 심한 경우 주선자와 그 여성분의 관계를 끊어버리기도 했다. 아마도 어떻게 이런 사람을 소개해줬냐. 그런 뉘앙스였을 것이다.
물론 이런 성격을 고치기 위해 노력도 많이 했다. 일부러 잘하지도 못하는 발표를 맡고, 공연 동아리를 가서 무대에 서는 등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에 나를 노출시켰다. 그렇게 나는 겉으로만 외향적인 사람이 되어갔고, 이상할 정도로 새로운 관계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의 상처 입은 본성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다가오는 모든 관계가 피상적인 것처럼 보였고, 그런 사람들은 과거의 내 상처를 몰랐다. 내가 본래 어떤 사람인지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진심을 줄 수 없었다.
「이제 그만 일어날까요.」
잠시 시답잖은 이야기로 말을 돌리던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아니. 이번에 소개 들어온 거, 나가지 마. 나 너 좋아하는 것 같아.」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좋은 사람인 건 알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고 했다. 애초에 그녀가 왜 나를 좋아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는데. 그녀와 나는 그저 피상적인 관계였는데. 나의 진짜 모습도 모르는 그녀가, 스스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나 알까. 나는 그녀와 사귈 마음도,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진심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집에서 좋아하는 영화를 보다 툭 눈물이 떨어졌다.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지고 그 아래에는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하지만 그녀를 절대 만날 수 없는 한 남자가 있다. 그 남자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유성을 막을 재간이 없다. 그렇게 하늘에서 갈라진 유성은 그대로 땅에 닿아 뜨거운 밤하늘을 별처럼 반짝 비춘다. 모든 것이 결국 꿈처럼 사라진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매번 같은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다. 유성이 떨어지는 곳에 서 있는 그 남자 때문이 아니라 그저 밤하늘이 예뻐서, 별처럼 빛나는 그 유성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슬픈 미소를 지었다. 이루어지지 못할 간절한 사랑. 그런 남자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위를 장식하는 밤하늘은 원망스러울 정도로 예쁘기만 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남자는 결국 꿈처럼 다시 아름다운 시절로 되돌아가 절대 만나지 못할 것 같던 그 여자를 만난다. 나는 끊어지지 못할 운명 같은,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눈물짓는 나를 발견하자 괜히 웃음이 났다. 세상엔 운명 같은 것은 없는데. 영원 같은 것도 없는데. 사람에게 남는 것은 외로움과 배신과 죽음뿐인데. 다 알고 있으면서 왜 이런 걸 보고, 우는 건지. 왜 우는 건지. 나는 몰랐다. 그저 습하고 더운 그리움 같은 것이, 가슴팍 어딘가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영화가 틀어진 좁은 방 한편에 나는 혼자였고, 언제나 혼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