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reath in Jul 25. 2023

내 젊은 영혼의 고향을 향해

벨기에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벨기에로 가는 비행기가 이륙한다. 스페인에는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거의 확실하게 지금 나는 영영 스페인을 떠나는 중이다. 특별한 호오가 없던 나라에 대한 완전한 애정을 만들고 떠난다. 지금 쌓은 추억들을 나의 스페인이란 딱지 붙여두고 두고두고 조금씩 꺼내먹겠지.


어제 한 시간마다 깨길 반복한 탓에 거의 자지 못했는데도 잠이 오지 않는다. 모든 세포가 낱낱이 각성한 상태다. 심장 고동이 느껴진다. 벨기에에 다시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벅차고 애틋하다.


거기 아직도 스물한 살의 내가 있다. 어리고 철없으며 연약하지만 결의와 호기심으로 가득 차서 새파랗게 빛나는 나.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 일 년이 평생을 곱씹게 될 황금기가 확실하다는 것만큼은 본능적으로 알았던 나다. 언제든 다미안플레인 좁은 골목 코너를 돌아 내리막길로 접어들면 그 내가 활짝 웃고 있을 것 같아서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눈물이 날 것 같다.


나보다 조금 작은 이민가방을 메고 루벤 기차역에 내렸던 겨울이 생생하다. 전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언어인 플레미쉬의 생경한 억양을 배경음악 삼아, 눈길 닿는 사방이 동화 속 같아서 두리번대랴 끙끙대랴 분주했던 걸음. 낯설고 신기하고 축축하고 평온하고 벅차고 즐겁고 서운하고 긴장되고 행복하고 서럽고 유쾌했던, 다음 겨울까지 사계절 한 바퀴의 매 순간도 선명하다.


2010년 2월부터 2011년 2월까지 1년 동안 나와 부대껴 살았던 누구도 오늘 그 자리엔 없을 것이다. 추억으로 꽉 찼으나 텅 빈 오묘한 상태의 루벤에 간다. 내 방 창가에서 보이던 호텔에서 이틀 밤을 묵는다. 그 시절 창밖을 내다보면서 10년 뒤 멋진 어른이 되어 이 동네에 다시 놀러 와야지, 저기 방을 얻어 지금 내 방의 창문을 바라보며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다.


고작 스물두 살에 뭐가 그리 다급하고 분주했을까. 육 개월 더 머무르며 불어 더 익히고 글 쓰다가 갈까 고민하고 알아봤지만, 처음 정한 대로 돌아갔다. 얼른 서울 가서 언론고시 준비하고 기자 되고 싶다는 강박 때문이었다. 거기 힘입어 루벤을 떠난 지 2년 만에 기자가 됐고, 지금은 그때의 나는 결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직장에서 완전히 다른 일을 하며 산다.


기자는 해봤지만 멋진 어른이 되었는지 자신이 없고, 귀환은 3년이나 늦어버렸다. 조금 다른 모양이나마 나와의 약속을 지킨 스스로가 대견하다. 이 날을 만나기까지 지난 13년 열심히 살지 않은 순간은 없었다고, 미지근할 틈 없이 뜨거웠노라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감사한 일이다.


피천득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지 않는 편이 좋았겠더라고 썼지만 나는 그 문장을 읽을 때마다 갸웃거렸다. 벨기에를 다시 만나면 생의 모든 첫사랑 중 하나와 최초로 재회하게 된다. 천년을 버틴 골목골목은 겨우 십삼 년에 코 찡긋하며 나를 안아줄 것이다. 나는 내 사랑이 그대로여도, 조금 변했거나 바랬다고 해도 끌어안을 준비가 됐다. 그때 그 사랑을 만나러 가는 것일 수도, 새롭게 또 한 번 사랑에 빠지러 가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것이든 두근거린다.


2023. 6. 7.


2010년의 벨기에 루벤


매거진의 이전글 2021, 조용히 완전히 영원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