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대일 May 13. 2024

중용, 자기객관화

   현재까지 그 작품이 전해지는 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가 아이스킬로스(7편), 소포클레스(7편), 에우리피데스(18편) 세 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들 중에서 아이스킬로스는 비극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 중 <자비로운 여신들>과 엉뚱하게도 중용을 연결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물론 그리스 비극을 읽거나 본 적은 없다. 대신 그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가 쓴 칼럼이 한문에 정통한 대학교수의 중용 해석과 왠지 어슷비슷해서 억지로 끌어와 글 앞뒤로 배치했을 뿐이다. 고故 최일남 선생은 원전에서 곧장 옮기지 않고 다른 책이 인용한 것을 재차 원용하는 스스러움을 '마고비키​孫引'라는 말로 슬쩍 눅인다고 했는데 나도 어쩔 수 없이 편승할 수밖에. ​


   <자비로운 여신들>의 주인공 오레스테스는 아버지를 살해한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를 살해한다.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유일한 공간은 델피 신전밖에 없다고 여긴 오레스테스는 거기로 가 신들의 재판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게 비극이 내용이다. 

   델피는 그리스 단어로 ‘자궁’을 의미하는 ‘델퓌스delphys’에서 유래했다. 돌고래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돌핀dolphin’도 생김새가 자궁과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델피에는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장소인 옴팔로스가 있다. 인간은 이곳에서 신성을 회복하여 야만에서 문명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결심과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인간이 오래된 자아를 벗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델피야말로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장소인 셈이다. 델피에서 오레스테스가 구원받은 까닭이겠다. 

   델피는 고대 그리스를 거쳐 로마 시대에서도 자신을 새롭게 변신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순례지가 되었다. 2세기 로마시대 집정관이자 작가였던 플리니가 이 곳에 와 고대 그리스인들이 남긴 세 가지 새김글을 발견했다고 전한다. 하나는 ‘그노티 세아우톤’, 즉 ‘ 너 자신을 알라’이다. 자신을 응시하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자이다. 두 번째는 ‘메덴 아간’, 즉 ‘어느 것도 무리하게 실행하지 말라’이다. 지혜로운 삶은 중용을 지키는 삶이다. 세 번째 새김글은 ‘엑귀아 파라 다테’, 즉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지 말라. 불행이 가까이 와 있다’이다.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침묵을 지키는 자다.(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카타르시스, 배철현 비극 읽기-새로운 세계의 질서는 복수가 아닌 역지사지의 공감 위에서>, 한국일보, 2017.09.02 대강 요약)


   그노티 세아우톤

   메덴 아간

   엑귀아 파라 다테


   세 가지 새김글은 각각 독자적인 문구가 아닌 뜻이 일통하는 신탁처럼 들린다. 지혜로운 자는 자신을 똑바로 응시해 제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할 줄 알아 때론 침묵을 미덕으로 여긴다라는.


​   우리는 “나서지 말고 뒤처지지도 말고 중간만 가라”는 조언을 많이 듣곤 한다. 약자로 살아가기 위한 보신 전략으로 말할 수는 있겠지만, 때로 이것이 중용中庸의 지혜인 양 설파되는 것이 문제다. “적당히 해라. 사람이 중용을 알아야지.” 남들은 알면서도 가만히 있는 일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끝까지 따지는 이를 향해 던지는 이 한마디는 폭력이 될 수 있다.

   중용의 중은 가운데를 뜻하지만, 그 가운데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가운데를 찾아가는 것이 중용이다. 잔을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채우는 게 중용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생맥주잔이라면 가득 채워야 중용이지만, 소주잔을 가득 채우면 과하다고 할 것이다. 늘 변화하는 상황에 맞추어 사심 없이 말랑말랑한 유동성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용의 핵심이다.

   “강직하면서도 온화하고, 너그러우면서도 엄격해야 한다.” 까마득한 옛날, 순 임금이 음악을 통한 교육을 명하면서 했다는 말이다. 이를 실현한 인물로 거론되는 공자는 “온화하면서도 엄정하고, 공손하면서도 평안하다”는 평을 들었다. “직이온直而溫”에서 “공이안恭而安”까지, 모두 ‘이而’를 사이에 두고 서로 모순되기 쉬운 덕목을 나열하였다. 두 덕목의 중간을 취하라고 하지 않았다. 둘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동시에 가지기 어려운 것을 동시에 요구하였으니,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理想이다. 그러나 이 버릴 수 없는 이상에 중용의 본질이 있다. 공자는 순 임금을 두고 “양 극단 가운데 어느 하나도 놓지 않고 동시에 고려하면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공평무사한 마음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했다”고 칭송했다. 바로 중용의 정치이다.

   극단의 논리가 횡행하는 세태를 걱정하는 목소리들이 높다. 노사분규의 현장에서든, 미투 운동의 전선에서든, 안일하게 중도를 말하는 것은 상황을 호도하거나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다. 상황마다 얽혀 있는 사정을 쉽사리 재단할 수는 없지만, 때로 무게 차이가 심한 경우에는 한쪽에 치우친 곳을 잡아야 균형을 이룰 수 있다. 일시적인 쏠림이 판 자체의 평형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중심을 잡으려는 지속적 움직임을 멈춘 채 고정된 기준을 중용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는 순간, 누구든 ‘꼰대’가 될 수 있다.(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송혁기의 책상물림-중용의 이름으로>, 경향신문, 2018.03.13 전문)


   ​두 인용글에서 핵심적인 키워드는 자신을 객관화하는 균형, 즉 중용이다.

작가의 이전글 시 읽는 일요일(15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