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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Jul 18. 2024

당사자만 아는 부부 사이

   부부는 항상 같이 다닌다. 하지만 그리 다정해 보이지는 않는다. 남편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아내는 흡사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형상이다. 깎새와 비슷한 연배인 성싶은 남편이란 작자는 남들이 보건 말건 제 아내한테 우악살스럽게 군다. 아내가 커피믹스를 마시려고 하자 물도 마시지 말라며 대기석에 옴짝달싹을 못 하게 만들거나 머리 깎고 손수 머리를 감고 난 뒤 타월 대령하라며 윽박지르는 꼴이 꼭 종 부리듯 해 볼썽사납다. 

   허나 괴이한 쪽은 아내다.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구박과 수모를 당하는데도 단단히 약점 잡힌 사람모양 꼼짝을 못 하는 처신이 이상하리만치 안쓰러운데 정작 본인은 그런가 부다 태연스럽다. 남편이 강포해진 까닭이 오롯이 자기 탓이라는 죄책감이랄지 팔자가 사나워 저런 인간을 남편이라고 둘 수밖에 없다는 체념이랄지 뭐라고 딱히 규정하기 어려운 복잡미묘한 감정이 그늘져 있는, 그로테스크하다고밖에는 표현할 길 없는 얼굴을 다달이 본다는 건 생각보다 곤혹스럽다. 

   그런 부부를 두고 깎새는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한다. 혹시 바람을 피다가 남편한테 딱 걸리는 바람에 코가 꿰인 게 아닐까. 이혼 귀책사유가 자기한테 있는데다 남편이란 작자가 워낙 간교한 기질인지라 이혼이 능사가 아니라고 판단해 굴종을 대신 택한 게 아닐까. 남편은 그런 아내를 예속해 학대를 일삼는 일종의 가스라이팅을 저지르고 있는 거고. 문제적 부부 등장에 맞춰 전에 써 둔 이야기에 다른 내용을 보태거나 지우는 짓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깎새도 엔간하지는 않다.  

   헌데 어느날 대기석에서 기다리던 아내의 표정을 무심코 훔쳐 본 깎새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지울 길 없었다. 그건 찰나였다. 머리를 다 깎고 머리 감으러 세면장으로 발길을 옮기던 남편을 바라보던 아내 얼굴에 비웃음이 스치고 지나가는 찰나, 그건 세상의 그 어떤 비수보다 날이 선 섬뜩함이었으니. 동시에 머릿속에서 탁! 하고 번득이는 무엇이 떠오르는 게 아닌가. 그걸 깨달음이라고 해야 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의도된 굴종'이라고밖엔 형언할 수 없는 용렬한 표현력을 용서하길 바란다. 참담하기 짝이 없는 굴욕을 견디는 건 오로지 복수의 기회만을 노리기 위해서라는 듯이.


   남자는 교활하다 . 여자의 첫 남자인 듯이 군다. 하지만 여자는 더 교활하다. 남자의 마지막 여자인 듯이 군다. 


   버나드 쇼 명언을 일본 작가 요네하라 마리는 자기 저서 『속담 인류학』(한승동 옮김, 하늘산책, 2012)에서 기득권 논리에 비중을 두고 해석하려 들었다. 즉, 남자의 교활함이란 결국 먼저 차지하는 놈이 임자라는 선취권 획득을 위한 투쟁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 하지만 버나드 쇼 명언의 방점은 뒷부분이어야 마땅하다. 뛰는 남자 위에 나는 여자야말로 선취권을 획득한 남자 등에 빨대를 꽂아 마지막 순정까지 쪽쪽 다 빨아먹는 팜므파탈이니까. 

   남편은 자기 아내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고 득의만만해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자만시켜 소싯적에 말썽깨나 부렸고 앞으로 또 그러지 말란 법이 없듯 시한폭탄 같은 남편이란 멍청이를 얌전하게 다루려고 획책한 아내의 계락이 아니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러니 얻을 득이 실보다 많다면 백만 번이고 천만 번이고 의도된 굴종을 택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어쩌면 남편보다 아내가 더 영악하고 음험한 사람일지 모른다. 버나드 쇼 명언을 우리 식으로 바꾸어 본다. 부처님(아내) 손바닥 안 손오공(남편). 여자의 교활함이 더 치명적이다. 

   깎새의 상상력은 여기까지다. 그리고 결국 부질없는 짓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부부 사이는 당사자 외엔 아무도 모르니까. 제아무리 신드롬을 일으키고 열렬한 팬덤을 보유한 유명짜한 부부 상담 카운슬러라고 한들 그럴싸한 말장난일 수밖에 없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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