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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Jul 22. 2024

변덕과 건망증이 결합하면 장사는 끝

   맡긴 물건 찾듯 먼젓번처럼 깎아 달라고 하면 난감하다. 전에 깎아 봤으니 제 머리 스타일쯤 눈 감고도 척척이지 않겠냐는 게 손님 주장인데 터무니없다. 그가 누구인지 깎새는 잘 모른다. 이른바 단골 손님으로 분류되지 않는 한 말이다. 여기서 단골 손님이라 하면 다달이 정기적으로 6개월 이상 깎새 점방을 드나들어야 겨우 깎새 눈에 들어오는 사람을 지칭한다. 이래가지고서야 장사치 눈썰미로는 절망적이다. 지독한 건망증은 남들한테 굳이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은 깎새의 치명적 약점이다.   

   꾀를 내긴 했다. 허물없이 지내는 단골이 아니라면 눈에 익든 설든 일단 "어떻게 깎아 드릴까요?" 묻고 시작한다. 물론 일전에 깎은 자국, 즉 커트선이 눈에 대번에 들어오지만 괜한 눈대중만 믿고 저지르는 어림짐작은 자충수가 되기 십상이다. 다는 아닐지라도 손님은 변덕이 심하다. 지난달 깎은 스타일을 웬만하면 고수할 법도 한데 요랬다조랬다 요구가 수시로 바뀐다. 물어보는 걸 깜빡하고 먼젓번처럼 실컷 깎고 났더니 정색해서 골라 달라는 A/S를 요구하면 깎새만 애먼 놈 된다. 커트보를 거뒀다가 다시 치는 짓은 의외로 번거롭고 요즘같이 맹하일 땐 불쾌지수가 확 치밀어 올라 급기야 손님 뒤통수가 샌드백으로 보이는 착각에 이르게 되고.

   재차 밝히건대 건망증이 의외로 심한 편인 깎새다. 격주로 찾는 경찰관 손님 머리는 전형적인 스포츠형이다. 윗머리는 12밀리, 옆과 뒷머리는 3밀리 덧날을 바리캉에 끼워 깎아야 작업이 편한데 올 적마다 "15밀리?" 묻다가 "도대체 언제쯤 정답을 맞힐랍니까?" 핀잔이 되돌아오곤 한다. 커피 사 먹으라면서 우수리를 안 받는 깔롱쟁이 단골 손님 염색약 색깔이 흑갈색인데도 흑색을 집다가 정신머리 가출해서 여태 안 돌아왔냐는 빈정거림에 쥐구멍을 찾아 헤매는 일도 예사다. "원장도 참 어지간허요." 혀를 차는 단골들 앞에서 이 빌어먹을 건망증을 다스리는 데 특효인 게 뭔지 꼭 알아보겠다고 강다짐을 하지만 모든 작업이 끝나고 나면 그마저도 까먹기 일쑤다.

   손님 변덕과 깎새 건망증이 결합해 화학적 반응을 일으킨다면 환장, 환장 그런 대환장 파티도 없을 게다. 그 파티의 끝은 곧 나락일지니 한시도 정신줄을 놓지 않게 긴장해야 마땅하다. 하여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변한다'는 사실 뿐임을 금과옥조로 여김으로써 손님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기억력조차 불신하기 바쁜 깎새는 돌다리도 두들겨 가며 건너는 심정으로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 대신 '오늘도 묻는다마는 정신없는 이 병통'을 부르짖으며 단속할 수밖에 없다.    


​   건망증에는 3단계가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다음은 전화벨이 울린 다음의 대사다.

   1단계 : 여보세요. 거기 성말구 선생 계십니까. 본인이신가요?  예, 그런데 내가 뭐 때문에 전화를 했더라? 혹시 아시겠습니까?

   2단계 : 여보세요. 저는 성억제라고 합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만 거기 전화 받는 분이 누구신가요? 제가 누구한테 전화를 했는지 헷갈려서…

   3단계 : 여보세요. 저 성말구 선생 계신가요. 예, 저요? 저는, 저는, 저는…(소리가 멀어지며) 여보! 내 이름이 뭐였지? (성석제, 「즐겁게 춤을 추다가」,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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