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대일 Nov 18. 2024

두 청년

   재작년 가을께 짧디 짧은 머리 한쪽을 바싹 치켜 깎다 만 몰골을 하고선 한 청년이 등장했다. 티를 입지 않고 찢어발겨 걸친 걸로 착각이 들게 화가 단단히 나 있는 대흉근과 이두박근을 보유한 우락부락한 덩치가 두둥하고 튀어나오니 그길로 오금이 저린 깎새가 태연한 척 겨우 물었다.

   "어떻게 해 드릴까요?"

   휴대폰을 꺼내 들이밀더니 화면하고 똑같이 깎아 달랬다.

   "해병대 돌격머리인데, 해병대세요?"

   "아닙니다. 아직 고등학생입니다."

   "해병대 스타일을 좋아하나 보네."

   "해병대 꼭 갈 겁니다!"

   고3이었던 그 청년은 수능 시험 치는 대신 보디빌딩 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학과에 수시 합격했고 점방 단골로 깎새한테도 승인되었다. 앳된 티가 덜 가신 깍짓동이 해병대 무엇에 반해 멀쩡한 머리를 빡빡 밀면서까지 추종하는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저 깎새 점방을 드나들며 관찰한 청년 행실로 봐서 젊은 남성 특유의 낭만적 호전성이랄지 마초성이 '안 되면 될 때까지'란 구호와 영합한 게 아닌지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 청년 엊그제 점방을 찾았길래 예의 돌격머리를 신나게 깎고 있었다. 문득 잊어버렸다 생각난 듯이 깎새가 물었다.

   "군대 갈 때 된 것 같은데, 해병대 자원했지요?"

   "내년 2월 3사단 입대합니다." 

   "으잉? 해병대가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리 됐습니다." 

   "강원도라 눈 구경은 실컷 하겠구만. 사단 훈련소 가거든 수색대 자원하겠다고 손 들어요. 해병대만큼 빡세겠지만 거기 군생활 해병대 못지않게 멋질 테니."

   남이사 '필승' 대신 '백골'을 외치며 박박 기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님에도 서운했는지 괜히 입맛만 다시던 깎새와는 달리 사단 수색대 어쩌구저쩌구에 청년 눈빛은 되레 똘망똘망해졌다. 길이 아주 없는 건 아니구나, 광명 찾은 기미는 깎새만 포착한 착각일까. 아무튼 내년 2월 이후 18개월 잠정적으로 골수 단골 한 명 잃어버릴 지경이라 괜히 또 서운해지는 깎새.

   깎새가 또 잊어버렸다 생각난 듯이 질문 공세를 이어갔다.

   "일전에 한양대학교 아니면 대학 안 들어가겠다고 강다짐하던 친구는 올 수능 점수 좋게 받았는지 모르겠네." 

   올 2월로 기억한다. 깍짓동 청년이 한창 머리를 깎고 있는데 키가 훤칠하고 인물까지 잘난 다른 청년이 점방 문을 열고 등장하더니 깍짓동 청년을 보고선 알은체를 했다. 상대가 응수를 하는데 영 미적지근한 것이 썩 친한 사이가 아님을 대번에 눈치챘다. 깍짓동 청년이 볼일 다 보고 나간 뒤 이발의자에 앉은 다른 청년이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선 스포츠형으로 확 밀어 달랬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얘도 해병대 매니아인가 싶었지만 깍짓동과는 뉘앙스가 천양지차라, "실연당했어요?" 물었더니 마음 다잡고 재수할 작정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도대체 어디를 가고 싶길래 또 사서 고생이냐 단도직입하니 일말의 망설임이라곤 없이 "한양대학교요" 숫제 부르짖는 게 아닌가. 그 학교 가서 뭘 하고 싶냐며 말꼬리를 놓지 않으니 "증권사 입사하려구요"해서 증권맨이 되면 뭐가 좋은지 거푸 따지듯 물었더니 "부자되려구요" 아퀴를 지어 버리니 더이상 이어갈 말이 궁하고 말았던 깍새였다.

   부자가 되자면 증권사를 들어가야 하고 한양대 입학이 유능한 증권맨이 되는 지름길이라는 논리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지만 달리 반박할 수 없었던 까닭은, 젊은 청년의 이상을 "나 때는 말야"라는 '라떼 화법'으로 뭉개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을 뿐더러 야심찬 목표에는 기실 자기만의 숭고하면서도 은밀한 속셈이 도사리고 있어 타인의 잣대를 불허하는 자기만의 신성불가침 영역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 청년의 야무진 포부에 어느 정도는 솔직히 감화되어서였다. 꿈도 없고 욕심도 없이 사는 것보다야 백배 천배 낫긴 하니까. 그치만 나이 겨우 스물에 인생 목표를 '부자'로 상정한 점은 왠지 씁쓸했다. 인생을 윤택하게 사는 길은 부자가 아니라도 여러 갈래일 텐데 청춘의 날개를 막 펼치기도 전에 배금주의의 노예를 자청하는 건 퇴행적 발상임은 부인할 수 없다. 하여 대책은 없이 오지랖만 넓은 깎새로선 속이 엔간히 시끄러웠을 게다.

   다시 엊그제로 돌아와, 한양대 진학을 꿈꾸는 친구 안부를 묻는 깎새한테 깍짓동 청년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별로 안 친해서 잘 모르겠지만, 삼수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돌긴 하대요."

   "허 참."

   기가 막힌 나머지 탄식이 절로 튀어나와 깜짝 놀란 깎새가 얼른 분위기를 추스렸다.

   "스포츠로 깎겠다고 조만간 또 찾아오겠구먼."

   뭔 대수라고 그 귀한 청춘을 두 해씩이나 좀먹으려 할까.

작가의 이전글 시 읽는 일요일(17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