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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김치 상념

by 김대일

충북 음성 처갓집에서 파김치를 보내왔다. 요새 나는 쪽파는 단맛이 일품이라 김치로 만들어 먹으면 밥도둑이랬다. 파 다듬는 게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지만 수고를 마다않은 장모와 바로 위 처형, 처제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덕분에 다른 반찬 걱정없이 밥 한 그릇 뚝딱이다. 김치 냉장고에서 잘 익은 김장 김치에 파김치까지, 당분간 반찬 시름을 던 마누라 얼굴이 해사하다.

처갓집 김치가 아니면 김치를 안 먹게 식성이 변한 내가 까탈스럽기 그지없지만 처갓집 김치에 비견될 만한 김치를 먹어보질 못했으니 어쩌랴, 이대로 사는 수밖에. 비릿한 젓갈내가 강한 바닷가 김치가 모태 김치인 건 맞지만 담백하고 깔끔한 맛에 점점 끌리는 건 나이가 들어 체질이 변한 까닭일까 아니면 8녀 1남 대가족을 아우르는 장모의 손맛에 완전히 길들여진 까닭일까. 팔순을 훌쩍 넘겨 노쇠해질 대로 노쇠해진 장모는 집안일에서 손을 뗐지만 가까이 사는 처형, 처제를 다그쳐서라도 김치뿐 아니라 때에 맞는 반찬을 만들어 보내 주신다. 대부분이 처갓집 텃밭에서 유기농으로 재배한 식재료들이니 싱싱함은 말할 필요가 없거니와 정성이 듬뿍 들어간 손맛에 중독되지 않았다면 처갓집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처갓집 김장은 풀장 같이 둥글넓데데한 김장 매트에다 지난 밤 우려낸 다시마 육수를 붓는 것으로 시작된다. 무우, 사과, 배를 갈아 헝겁에 싸서 즙을 꼭 짜내어 붓고, 음성 햇고추 빻아넣으면 바야흐로 충청도 김장 양념 고유의 풍미가 더해진다. 액젓과 새우젓, 다진 마늘, 생강, 소금, 조미료, 설탕을 알맞게 넣어 한참을 버무린다. 그런 다음 미리 썰어놓은 무채, 갓, 잔파를 양껏 넣어 또 한참을 버무리면 김장 양념소가 완성된다. 처갓집 김치가 최고라고 단언하는 데는 양념소가 큰 몫을 한다. 처갓집 양념소에는 텃밭에서 직접 재배한 재료들로만 이뤄진 천연덕스러움과 팔순 넘은 장모의 오랜 손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한번 맛을 들이면 다른 김치는 쳐다도 안 보게 만드는 마력을 지녔다. 꼭 넣을 것만 넣어 만드는 충청도 김치 특유의 담백함, 소박함이 시그니처인 셈이다.

한나절 내내 배추를 치대고 나면 김장 김치와 푹 삶은 수육, 싱싱한 굴로 한 상 가득 차려 놓고 온 가족 둘러앉아 거하게 뒤풀이를 연다. 연례행사를 무사히 치뤘다는 안도감과 일 년의 두 번, 장모 생신과 김장 담그는 날만은 꼭 모여 격조했던 가족 간의 회포를 푸는 정다움이 늦가을 밤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는 하지만 무자식보다는 다복하다. 한 해의 끄트머리에 임해 어김없이 엄습하는 마음의 허기를 달래고자 한다면 처갓집 김장하는 날만 손꼽는다. 갓 담은 생김치, 겉절이, 안 익어 알싸한 무우 섞박지를 게걸스레 먹어대야지만 원기가 회복되니까 말이다.

벌써 서너 해가 지났다. 연로하신 장모 건강을 염려해 각자 알아서 김장하기로 8녀1남이 합의를 본 게 말이다. 허나 너무 박정하다며 처갓집 출입이 잦은 몇몇 식구들끼리 모여 전보다는 조촐하게 김장을 강행하지만 배추 농사를 못해 절인 배추를 사다 김장을 하고부터는 아삭아삭하고 단맛이 풍부한 처갓집 텃밭에서 나는 배추 특유의 식감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양념소를 만드는 손맛이 어디 가질 않아서 처갓집 김치만의 풍미는 여전하니 그나마 아쉬움이 덜하다. 예전 맛이 아니라는 둥 수다를 떨어대지만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다. 깎새로 전향하겠다고 마음먹은 뒤로 자격시험 준비, 주말 알바, 개업으로 이어지는 요 몇 년 처갓집 발길을 뚝 끊은 주제에 무슨 염치로 맛이 있니 없니 타박을 하겠는가. 잊지 않고 부산 식구 챙겨주는 아량에 두고두고 감지덕지해도 시원찮을 판에 말이다.

시골에서 음식이 올 적마다 이 호사를 언제까지 누릴 수 있을지 마음 한 켠이 무겁다. 연로하신 장모 얼굴이 어김없이 떠오르고 받는 것에만 익숙한 탓에 보답하는 법을 모르다 실기하지나 않을지 두려워서다. 파김치를 먹다가 생각이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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