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B에 분노하고, 언론의 역할을 대해 다시 묻다
평소 나는 ‘분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어린 시절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머리가 크면서 변했다. 짐작컨대 타인 앞에서 여과 없이 감정을 드러내는 습관이 결코 관계 형성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걸 깨닫게 된 뒤부터였던 것 같다.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도 있었다. 남들은 그냥 웃고 넘기는 일을 내가 유난히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걸지도 모른다는 검열이 작용했던 탓이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나는 ‘분노’하는 법마저 까먹었고, 결국 ‘분노 고자’, 아니 ‘감정 고자’가 되어야 했다. 거세된 감정을 되살리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 <주진우의 이명박 추격기>를 읽는 동안은 아니었다. 마지막 책장을 넘길 때까지, 나는 ‘분노’에 젖어 있었다. 달아오른 열을 식히느라 한동안 잠을 청하지 못했던 기억도 난다. 그래서 책의 저자인 주진우 기자에게 새삼 고맙다. 그대 덕분에 나는 세상의 부정과 비리에 좀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갖고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됐으니.
내 마음 속 분노의 화살은 여러 곳을 향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 이는 단연 MB였다. 주진우의 말처럼 MB는 ‘돈의 신’이다. 돈을 버는 데 있어서는 누구도 그를 따라 올 자가 없다. 신은 초월적인 존재다. 그들은 전지전능한 권능을 바탕으로 인간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세상을 움직인다. 이명박도 그렇다. 그는 천부적인 솜씨로 돈을 빼돌리고, 나라를 주무르며, 온 국민을 바보로 만든다. 그것이 MB가 부정과 비리의 달인이라고 의심하는 이들은 많지만, 정작 그가 저지른 범죄의 실체를 소상히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문 이유다. 이 책을 일기 전까지는 나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사실, 글을 쓰는 지금도 완전히 이해를 하진 못했다. 허나, 적어도 그의 범죄가 일상의 언어로 설명될 수 없다는 건 알겠다. 더불어 그가 온갖 경제·금융 시스템을 활용해 빼돌린 돈이 우리들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혈세’라는 것도. 만약 그가 박근혜나 최순실처럼 무식한 탐관오리였다면 나는 그를 비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크 나이트>의 조커나 <오션스 일레븐>의 대니 오션을 연상시킬 정도로 영악하다. 그래서 나는 조소하지 못하고 분노한다.
MB 못지않게 나의 화를 부추겼던 이들이 바로 검찰과 국정원이었다. 이미 지면과 방송을 통해 검찰과 국정원이 얼마나 비상식적인 집단인지 접한 바 있었다. 올해 4월에 벌어졌던 검찰의 ‘돈 봉투 만찬사건’과 현재 수사 중에 있는 국정원의 ‘사이버 여론 조작’사건이 대표적인 경우다. 최근엔 국정원이 댓글 조작뿐 아니라, 국내 영화산업 전반에 개입했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주진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들은 MB의 비리를 은폐하는데 일조한 공범자이기도 하다. 검찰은 김경준의 거짓 자백을 유도하려고 구형량을 줄여주겠다는 거짓말을 했다. 국정원은 마치 MB의 사조직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진우의 뒤를 쫓았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복무해야할 국가기관이 하는 일 치곤 조악하다. 두 조직이 정권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니 비소를 머금고 넘길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범죄의 혐의를 덮는 건 아니지 않은가. 권력을 비판하고 감시하는 일에 충실한 언론인의 뒤를 밟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이 책을 계기로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더불어 언론의 역할이 무엇일지 고민해본다. 지금껏 나는 ‘진실 된 보도’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라 생각했다. 이 세상 속에 주관적인 프레임을 거치지 않고 탄생하는 보도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진보 매체든 보수 매체든 결국 그들만의 시각으로 사물과 현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고, 그래서 누가 더 진실에 가까운 보도를 하는 지를 따져보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참과 거짓’, 혹은 ‘빛과 어둠’처럼 둘로 가르듯 명약관화한 ‘진실’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는 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진실’이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오히려 인간이 진실과 거리를 두고 외면하는 것처럼 보인다. 진실은 언제나 불편한 법이지 않던가. 불편한 진실을 덮고 감추는 건 결국 인간이다. 언론에게 주어진 책무가 있다면, 바로 이렇게 은폐된 진실을 밝혀내는 것일 테다. 그렇게 우리 사회의 꺼지지 않는 ‘등대’이자 ‘파수꾼’이 되는 것일 게다. 등대는 어둠 속을 항해하는 배를 위해 항로를 밝혀준다. 언론도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감춰진 진실을 밝혀줘야 하지 않을까. 더불어 파수꾼처럼, 우리들의 눈과 귀가 닿지 않는 영역까지 파고들어, 권력이라는 이름의 장막을 걷어내고, 숨겨진 사실의 파편을 길어 올려야 하지 않을까.
주진우는 그런 면에서 훌륭한 기자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공공재에 비유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는 자신의 안위보다 기자로서 해야 할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숱한 위협과 감시 속에서도 그는 움츠러들지 않고 취재를 이어나가며, 기사를 쓴다. 그의 노력 덕분에 우리가 알 수 있었던 진실들도 꽤 많다. 얼마 전 그는 언론사 간부들의 장충기 전 미래전략실 차장에게 보낸 청탁 메시지를 공개함으로써, 언경유착의 실태를 세상에 알렸다. 2011년엔 이명박의 내곡동 사저 프로젝트를 보도하여, 실제 프로젝트가 무산시키기도 했다. 2006년엔 전두환의 비자금 저수지 수사를 재개시켜 부정한 자금을 몰수되고, 전두환의 아들 전재용이 감옥행 버스를 타는 단초를 마련했다.
이처럼 ‘진실’을 가려내고자 온 몸을 던지는 그의 삶 자체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진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진실’과 ‘정의’라는 낱말은 촌스럽거나 유치하게 들리지 않는다. 대신 ‘절실함’이 느껴진다. 짐작컨대 그것은 그가 공허한 이상과 관념 위에서 세상을 관조하지 않고, 온몸으로 현실을 살아가기 때문이리라. 기사를 쓰는 일은 간단치 않다. 수많은 ‘사실’의 조각을 긁어모아야 한다. 잡히지 않은 단서를 얻기 위해 매 순간 부딪히고 깨지기를 반복해야 한다. 주진우는 그렇게 산다. 그를 가로막는 장애물과도 맞서야 한다. 지금껏 수십 건의 소송이 그를 괴롭혀 왔고, 지난한 법정싸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거기에 자신을 비롯한 가족에게 언제든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걱정하는 일은 덤이다. 이처럼, 그는 결코 만만치 않은 현실을 산다. 두려울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에겐 두려움을 이겨낼 용기가 있다. 그래서 그가 외치는 ‘정의’나 ‘진실’이 구름처럼 가볍지 않고, 쇳덩이처럼 무겁다.
혹자는 그를 ‘영웅 행세하는 선동가’라며 비난하기도 한다. 개인의 정파적 신념을 퍼뜨리거나 대중에게 영합하기 위해 ‘사실 추구’라는 기자의 직업적 가치를 훼손한다며 말이다. 실제로, 주기자가 대중들과 거리감 없이 지내는 건 사실이다. SNS 계정을 통해 추측성 글을 남길 때도 있고, 팟캐스트 방송에 출연해 감정적 발언을 쏟아내기도 한다.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비판이다. 하지만 나의 시각은 조금 다르다. 나는 오히려 의혹과 의심이 담긴 말과 글로 대중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그의 저널리즘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껏 주진우의 ‘추측’은 언제나 거대한 권력을 향했다. 권력의 힘은 세다. 힘이 있는 자가 힘이 없는 자를 의심하고 몰아세우는 건 쉽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어렵다. 권위 앞에선 한없이 나약해지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직장 상사의 잘못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도 조용히 귀와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과거 나의 모습만 반추해 봐도 그렇다. 그런 점에서, 주기자는 매 번 어려운 선택을 했다. 그가 썼던 기사들은 삼성, 대형 교회(순복음교회) 그리고 정치권력(전두환, MB)의 부정과 비리에 관한 것들이었다. 거꾸로, 그가 기자로서 가진 힘을 남용해 자기보다 힘이 약한 누군가를 마녀사냥 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는 무작정 의혹을 남발하는 비상식적 ‘음모론자’가 아니다. 그는 권력의 상대성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스스로가 차지하고 있는 힘의 위치를 고려해 싸워야 할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을 구분할 줄 아는 언론인이다. 그것이 그가 강자에게 더욱더 악착같이 덤벼는 이유다. 강자에게 강한 ‘저널리즘’은 모든 사회의 소망이 아니던가.
물론 주진우가 또 하나의 거대한 ‘언론 권력’으로 변모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더는 그를 지지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다. 그는 여전히 불리한 싸움을 하고 있다. 공중파 방송에서도, 주요 일간지에서도 그가 제시한 증거(MB가 ‘다스’의 실소유주임을 증명하는 자료)에 관한 보도를 찾을 수 없는 것만 봐도 그렇다. 어쩌면 그가 이번에 책을 내고 영화를 만든 것도, 승산 없는 싸움의 전세를 조금이라도 뒤집어보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MB의 비리를 공론화하기 위해서 말이다. ‘공표’의 권한을 가진 기자가 ‘기사’의 힘을 믿지 못해 ‘영화’와 ‘책’의 도움을 빌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는 건 나뿐일까. 어찌됐든 앞으로도 주기자의 MB 추격기가 계속되기를 기원한다. 더불어 그의 노력과 수고를 진심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