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에 지치고 힘든 날엔 전원교향곡을

by 피아니스트조현영


아이는 날마다 무럭무럭 크는 것 같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엄마가 쏟아부은 노력은 상당하다. 병원에서 퇴원하면서 받은 신생아 예방접종표를 벽에 떡 하니 붙여 놓고 체크했다. 천운이의 탄생 이후로 우리 집 벽에는 멋진 그림이나 연주 포스터 대신 육아에 관한 정보로 도배가 됐다.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이면 소년이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오늘도 무사히’라는 그림이 떠올랐다. 어릴 때 동네 이발관에 붙어 있는 이 액자를 보면서 피식 웃곤 했는데, 갈수록 ‘오늘도 무사히’가 마음에 와 닿는다. 사실 이 그림이 ‘오늘도 무사히’가 아닌 죠슈아 레이놀즈의 ‘어린 사무엘’인 것은 한참 후 어른이 돼서야 알았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그 그림의 제목을 ‘오늘도 무사히’로 알고 있다.

아무튼!

‘존재하는 모든 신에게 감사합니다. 오늘도 무사히, 별 탈 없이 살게 해 주셔서!’

<죠슈아 레이놀즈 '어린 사무엘'>

태어나서 4주 이내에 우리나라 아이들은 모두 BCG 결핵 예방접종을 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주사 바늘을 불에 달궜다가 맞는 주사라 ‘불주사’라고 불렀다. 불주사를 아는 사람들은 연배 있는 엄마다. 하하하! 실제로 불에 달구는 것을 본 적도 없는데, 이름 때문에 이미 겁먹고 피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요즘 주사는 도장형으로 아이의 소시지 살에 18개 구멍의 사각형 도장이 찍힌다. 어깨에 팽진이 생기지 않고, 흉터가 적게 남는다고 엄마들이 선호한다. 이렇게 생애 주기별로 하나씩 해야 하는 예방접종을 하다 보면 아이가 무탈하게 크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엄마 입장에서 음악가를 바라볼 때 안타까운 사람이 있다. 바로 베토벤이다. 베토벤이란 이름은 클래식을 몰라도 누구나 들어본 이름이다..

<베토벤과 자연>

베토벤은 잘 알다시피 귓병으로 힘든 인생을 살았다. 선천적으로 귀가 안 들린 건 아니지만 한창 활동하는 나이에 발병한 귓병은 평생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많은 학자들이 밝혀낸 베토벤의 사인은 납중독이다. 난청과 복통과 심한 두통이 드러나는 현상이었다. 이럴 때 엄마라도 옆에서 오래 살면서 의지가 됐어야 했는데, 베토벤 엄마는 일찌감치 돌아가신다. 1770년 생인 베토벤은 1787년 빈에서 음악 공부를 하려다가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 본(Bonn)으로 돌아온다. 17살 아직은 엄마가 필요한 나이인데. 어머니의 부재와 아버지 대신 식솔들을 책임져야 하는 생계형 작곡가로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는 와중에 전원교향곡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베토벤은 인생의 힘든 시기를 자연 속에서 산책하며, 소리를 듣는 대신 상상 속의 음을 느끼며 이 곡을 작곡했다. 나도 지금의 독박 육아라는 현실을 우아하게 산책을 하고 있다고 상상하면 음악이 달리 들린다.


BEETHOVEN Symphony No 6 (Pastoral) in F Op 68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 바장조 작품번호 68


베토벤은 교향곡을 9개 작곡했다. 평생 살면서 10개도 작곡 못했나 싶지만, 작품 수보다 중요한 것은 작품의 의미다. 베토벤이 작곡한 9개의 교향곡은 서양음악을 공부하는 모든 이에게 작곡의 표본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베토벤을 존경하고 따랐던 브람스는 그의 첫 교향곡을 쓰기까지 항상 베토벤의 그늘에 있었다. 그래서 브람스 교향곡 1번을 베토벤 교향곡 10번이라 부르기도 한다. 베토벤 교향곡 9개는 각각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그중에 6번인 ‘전원’ 교향곡은 듣고 있으면 정말 새소리, 바람소리, 나무소리가 들린다. 대서사시 같은 3번‘영웅’이나 5번 ‘운명’, 9번 ‘합창’ 등도 좋지만 편하게 아이랑 대화하면서 듣기엔 ‘전원’이 최적이다.


전체 연주 시간이 42분쯤 되는 교향곡을 틀어놓고 아이에게 말을 하다 보면 스르르 마음이 정화가 된다. 3분 정도 되는 가벼운 가요나 팝송도 좋지만 하루의 마무리는 언제나 전곡 연주로 듣는 전원이었다. 온전히 음악에 취해서 42분을 거닐고 나면 마음이 한결 편했다. 음악을 들었을 뿐인데 내 마음도 집안 공기도 청정해지는 기분이다. 육아로 지친 엄마들과 이런 느낌을 함께 느꼈으면 좋겠다. 전원은 앞서 작곡된 다른 교향곡들에 비해 훨씬 부드럽다. 실제로 공기 좋은 시골에서 느끼는 형언할 수 없는 기분 좋음이다. 베토벤 자신도 이 음악은 숲을 표현했다기보다는 숲에 갔을 때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게 의도라고 말했다.


베토벤이 이런 평화를 얻기 전까지 그도 역시 수많은 좌절과 슬픔을 겪었다. 1802년 그의 나이 32세에 요양차 들렀던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자살을 결심했다. 그리고 유서를 썼고, 실제로 죽음을 생각했지만 마음을 고쳐 먹는다. 자살 사건 이후로도 하일리겐슈타트에 머물렀던 베토벤은 숲을 사랑하는 남자가 된다. 그리하여 6년 뒤인 1808년에 전원교향곡을 작곡한다. 실제로 이 곡의 영감을 얻었던 산책길은 ‘베토벤의 길(Beethovengang)’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수도 빈에서 조금 떨어진 하일리겐슈타트는 이제는 퇴직한 부호들이 사는 동네가 됐지만, 1800년 베토벤 시대에는 소박한 시골이었다. 와인 생산국답게 향긋한 포도나무와 와이너리가 즐비하게 있는 하일리겐슈타트. 뭔가 엄청난 곳이라고 기대를 하고 가면 실망할 수도 있지만, 난 처음 그 길을 걸었을 때 이유 없이 눈물이 흘렀다. 음악의 성인이라고 불리는, 역사에 길이길이 남는 작곡가지만 당시의 그는 그저 자실밖에는 답이 없던 불쌍한 인간이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베토벤은 사각거리는 햇빛과 간지럼 피는 바람, 그리고 바람의 강도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는 나뭇잎을 눈 안에 담으면서 음악을 떠올렸다. 심상이란 마음속으로 그리는 이미지인데, 음악을 들으면서 심상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 음악은 바로 자신만의 인생 음악이 된다. 전곡은 5악장 구성으로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제1악장은 시골에 들어서는 즐거움을, 2악장은 졸졸 흐르는 실개천을, 3악장은 농부들의 즐거운 모임의 광경을 그리고 이어서 4악장은 갑자기 몰아치는 폭풍을, 마지막 5악장은 폭풍이 지나고 난 뒤 평화롭고 즐거운 마음으로 부르는 목동들의 노래를 표현했다. 음악을 처음 듣는 사람도 각 악장의 느낌을 자연스레 느낄 수 있다. 처음 만났지만 뭔가 오래되고 편한 사람 같은 좋은 음악이다. 화나고 힘든 날엔 더더욱 이런 음악을 들어야 한다. 클래식은 분명 정화의 음악이다.


유튜브 검색어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

BEETHOVEN Symphony No 6 (Pastoral) in F Op 68

지휘 크리스티안 틸레만 연주 빈 필하모니

https://youtu.be/s_xS8OLQYI0

베토벤 전원 교향곡 6번 1악장

https://youtu.be/pSEDRvNkw7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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