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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 만한 간호사 Jan 31. 2022

번아웃을 겪는 사람들의 특성

L 선배는 여타 다른 간호사들처럼 공무원이 되겠다며 병원을 나갔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줄곧 무척 따뜻한 사람이었으니 당연 좋은 간호사이기도 했다.

자기 환자 책임감을 가지고 돌고, 그렇게 담당하던 환자의 상태가 좋아지면 퇴근길에도 기뻐하며 병원을 니서고, 그 반대인 날에는 퇴근 후에도 내내 신경 쓰여하곤 했다. 보호자 대기실에서는 ‘설명 제일 잘해주고 착한 간호사’라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

당연히 나는 그가 이 일을 좋아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아직 신규 시절, 한 번은 그와 함께 술자리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처음 눈을 감겨드린 환자의 성함, 진단명, 또 마지막으로 보호자들이 환자에게 했던 말들, 그 시간의 창문밖 날씨까지 기억이 난다며, 씁쓸한 얼굴을 하고 이 일이 얼마나 감정소모가 심한지에 대해 소리높여 얘기했다. 그때도 당연히 나는 그가 그만큼이나 이 일을 좋아해서 이렇게 울분을 토하며 얘기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20대 초반. 이브닝 퇴근, 후더운 여름밤의 서대문역, 요란스러운 선술집. 노란 조명, 취기에 떠드는 사람들. 약간 김 빠진 맥주. 힘든 하루를 막 끝내고 지친 시간을 나누는 사람들.


나는 그에 비해서는 감정적으로 무던한 성정의 사람이어서 그를 보며 저런 따스운 간호사야말로 사람이 아플 때나 슬플 때 옆에 필요한 것이라고, 저런 선배가 되고 싶다고 종종 생각하곤 했다.


그 뒤로 함께 약 2년을 더 근무하고, 그는 다소 갑작스레 일을 스스로 그만두었다.

당연히 그는 병원 내 모두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고, 제법 안정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의아해했다. 승진을 한지 딱 한달 뒤였다.


다시 만난 선배는 지친 표정으로 더는 못하겠다고 했다. 그 맥 빠진 얼굴에서는 수많은 감정이 읽혔다.

혼자 짐작컨대 그는 여태껏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며 저질렀던 크고 작은 실수들, 할 뻔했던 일들, 했으면 좋았을 일들을 복기하고 그가 담당한 죽음들과 또 그 보호자들이 함께 실어 보낸 말들, 감정들을 어딘가에 소복소복 담고 있었던 거겠지. 또 그것들이 서서히 사포처럼 자신을 갉아서, 아마 그렇게 부드럽던 표면을 다소 거칠고 건조하게 만든 건지도 모른다. 그는 더는 환자를 안 보는 공무원이나 사무직을 해야겠다며 사직서를 냈다고 했다.


그 대화로부터도 벌써 4년이 지나 나는 이미 그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 근무하고, 많은 환자를 보았다.

어느 새부터 보호자들의 통곡 속에도 전처럼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전산처리를 먼저 신경 쓰게 되었고, 그 사실을 자각한 날 이후로는 내가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중환자실에는 더 이상 물러 터진 사람들은 많이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래서인지 한층 더 건조한 공간이 되었다. 결국, 병원은 본디 삭막다.

연차가 쌓이면 성장만 하는 줄 알았는데 되려 나는 분명 무언가 잃어버린 기분이다.


"번아웃"이라는 것은 사실 이 건조한 상황에서도 스스로 발화할 수 있을 정도로 따뜻한 사람들이 자신을 연소시켜 주위를 뎁히고 다 타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결국 나처럼 미적지근한 사람들만 남아 이 쓸쓸한 공간이 점점 차갑게 식어가는 것이 아닐까.


모쪼록. L 선배의 성공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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