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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임프제 Mar 23. 2024

안녕하세요 이방인 임프제입니다

인생이라는 산 책 사이에 짓궂은 신이 숨겨둔 나 사용설명서

여전히 서툴고 뚝딱거리는 나지만 오늘도…




“안녕하세요 이방인 임프제입니다”


오글거림을 감추려 다섯 손가락 쭉 펴서 말하고 보니 에쵸티 지오디 동방신기 저리 가라 싶게 세기말 아이돌 느낌이 나는 건 나만의 착각인 걸까. 고등학교 졸업하고 곧바로 타지로 유학을 갔다. 1년의 연수 기간을 거쳐 바로 대학교 4년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입사 그리고 1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 10년 동안 학생에서 직장인으로 사원에서 팀장으로 타지에서 쉴 새 없이 달려온 지 17년째. 나의 자기소개는 나의 변화와 함께 조금씩 업그레이드되었다.


(Unsplash)


처음 일본어를 배우면서는 “안녕하세요 일본 문부성 장학생 코스를 밟고 있는 연수생입니다.” 대학교에서 중국어 수업을 들었을 때는 “동경대학교 2학년 임프제입니다.” (안타깝게도 더 이상 중국어를 공부하지 않았기에 중국어로 할 수 있는 자기소개는 학생에서 사회인이 되지 못하고 여전히 대학교 2학년에 머물러 있다.) 입사 후에는 “ㅇㅇ 소속 ㅇㅇ프로젝트 ㅇㅇ팀 임프제입니다.” 그 뒤로 셀 수 없이 많은 버전의 자기소개를 해왔지만 그 한 줄의 소개에는 거침이 없었고 그 어떤 어려움도 주저도 없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진정 나를 잘 소개할 수 있는 한 문장이었는가 하는 질문에는 자신 있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내가 어느 정도 따뜻함을 지니고 있는 사람인지 지금까지 어떤 선택을 해왔는지 어떤 자세로 일을 마주하고 있는지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 어느 하나도 제대로 설명을 해줄 수 없었다. 수박 겉핥기식의 자기소개만 주구장창 해오며 호감 가는 웃는 얼굴로 인사하는 하루하루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할 때도 있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편리함이 좋았다. 내가 내미는 명함은 작고 네모난 종이 쪼가리에 써져 있던 내 직함은 내가 높이 세워 놓은 방화벽 같아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는 질문들을 원천 차단시키는 역할을 했다. 네 저는 이런 학교를 나왔고 이런 직장에 다니며 이런 일을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외국인이라고 함부로 판단하지 말았으면 합니다만…) 그리고 그런 선입관과 고정관념 뒤에서 나는 편하고 싶어 했고 실제로 편안했다. 어차피 진정한 내 모습은 내 사람들 이외에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 편이 군더더기 없이 일처리 하는 데에 훨씬 편리했던 게 사실이다.



그렇게 학력을 쌓고 커리어를 쌓고 강산이 변한다는 10년도 훌쩍 넘어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일을 하면 할수록 “근데 왜?”라는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는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하나하나 모아 온 퍼즐 조각, 동경대생, 컨설팅 회사 팀장, 연봉 같은… 그런 단어들이 나를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막상 그런 단어를 아무리 나열해 봐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퍼즐 그림이 맞춰지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고 매우 혼란스러웠는데 하나 확실하게 알 수 있었던 건 놀랍게도 내가 선택하고 살아온 그 모든 과정에 “내”가 없었다는 것.


(Unsplash)


겨우 그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나는 갓 결혼을 했고 실적을 인정받아 승진을 한 터였다.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했고 걱정 따위는 없을 거라고 단정 지었다. 사실은 힘들게 등산을 해서 올라간 높다란 바위 위에서 기분 좋게 주위를 둘러봤는데 홀가분하기는커녕 아찔한 어지러움이 밀려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올라서서 갑작스러운 이 느낌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지만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거침없이 내뱉은 자기소개는 뒤에 숨어있던 그 불편하고 낯선 감정을 오랫동안 모른 채 했다는 것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외면하는 하루하루가 쌓여 10년이 지났다. 이제야 용기를 내서 “나”라는 존재를 확인하려 내려다본 내 발끝은 보이질 않았고, 땅에 발을 디디고 서있는 줄 알았던 두 다리는 허공에서 제멋대로 허우적대고 있었다. “나”를 잃어버렸다. 아니 어쩌면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타지에서 생일을 보낸 지 10년째, 기념비적인 30살 생일에 나는 우울증을 선물 받았다.



똑바른 길을 걷고 있다고 아니 어쩌면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엘리트 트랙을 달려왔다고, 뒤 돌아보지 않아도 좋을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찾을 수 없다니… 세 살짜리가 떼쓰는 것도 아니고 서른 살짜리가 할 말은 아니지 않으냐고 나 스스로가 생각했다. 별 것 아니라고 일하기 싫어서 아니 힘들어서 그런 생각이 든 거라고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쉬운 일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조금이라도 ”나“의 판단이 필요한 일에는 엄청난 에너지와 시간을 필요로 했다. 한 사람의 팀장 몫을 해내지 못했다. 한 번 대차게 넘어지고 나니까 다시 일어설 수 없었다. 우울증이라는 병명은 내가 아파서 그런 거라는 납득할만한 이유를 제공했지만 사실 내가 다시 일어서기가 힘들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쪽팔려서… 30년이나 살면서 어떻게 ”나“에 대해 이렇게나 소홀할 수가 있었는지 너무나 한심해서 그랬더랬다.



의사는 나에게 지나치게 생각을 많이 하지 말 것을 권유했다. 잠을 자라고 수면유도제를 처방해 줬다. 효과는 없었다. 잠을 자면서도 생각을 했고 잠을 잘 수록 불안해졌고 죄책감이 들었다. 나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던 약을 끊고 미술학원에 등록했다. 그림을 그리면서는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선 하나를 그어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지 어느 방향으로 그을지 어디까지 그을지 힘을 세게 주어야 하는지 빼고 그려야 하는지 끊임없이 그림 생각만을 해야했다. 그림실력은 일절 나아지지 않았지만, 잡생각을 없앨 수 있었기에 병원비를 내는 것보다 학원비를 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내 그림이 어떻게 하면 더 진짜같이 잘 그릴 수 있게 되는지 선생님께 의견을 구했다. 선생님은 약간의 코칭을 하면서도 정답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림에 정답 따위 없으며 누구나 똑같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은 그 사람만의 색깔이 사라져서 재미없다고 했다. 그리고 학원을 그만뒀다. (그림 실력이 일절 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얻을 수 있는 답을 이미 얻은 것 같아서)


(Unsplash)


그리고 용기를 내어 오랫동안 항상 내 주변을 서성이며 떠다니던 낯선 감정을 직시했다. 어디서 온 건지 알 수 없는 외로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편함,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는 어색함, 언제나 낯선 느낌… 내가 “나”라는 존재를 알아내려 할수록 “나”는 그 어떤 단어로도 명확히 정의될 수 없었다. 나에겐 세상 모든 일이 어렵고 힘들고 불편했지만 실제로 내색하나 하지 않는 웃는 얼굴에 아무도 내 속을 알 수 없었다.


생각과 행동은 따로 놀았고 늘 뚝딱거리는 로봇 같았다.



무엇보다 오랜 해외 생활 속 나는 어디에도 속할 수 있었지만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다. 그게 어디라도 그 일부인 척 속해있는 척할 수 있었지만 진정 나 스스로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다. 30여 년을 배운 나의 언어가 다른 이의 언어로 1대 1로 결코 치환될 수 없는 것처럼 나는 한국인으로도 일본인으로도 쉽게 정의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쉽게 내뱉는 말들… “너 되게 일본인 같아.”, “너 되게 한국인 같아.” 한국에 가면 내가 일본인 같아서 참을 수가 없는 순간이 있고, 일본에 가면 내가 한국인 같아서 참을 수가 없는 순간이 있다. 내가 지독하게 혼란스러워 뚝딱거리는 그 순간, “너 되게 일본인 같아”, “너 되게 한국인 같아”라고 우리 사이에 선을 그어버리는 순간, 나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할 이유가 100가지 정도 떠오름과 동시에 사실은 내가 꾹꾹 숨겨둔 이질적이고 불편한 이 느낌을 들킨 것 같아서 순식간에 나한테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리고 스스로 묻는다. “그래서 그게 아니라면 너는 대체 뭔데?”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는 걸 안 순간 그저 해맑게 웃으면서 씁쓸하지만 ”그러네“라고 대답하기로 한다. 당최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서…



복직을 하고 몇 년 후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과 퇴사를 거쳐 마드리드 1년살이까지…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을 거쳐 겨우 나를 정의할 단어를 찾아냈다. “이방인” 그리고 “INFJ(인프제)” 그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이보다 나를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 이 두 단어를 찾아냈을 때 (아니 어쩌면 찾아냈다는 표현보다 운명적으로 만났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어딘가에 처박아두고 잊고 있던 오래된 사용설명서를 찾아낸 기분이었다. 물건을 살 때는 다 안다고 생각해서 책장 어느 책들 사이에 아무렇게나 막 꽂아 놓은 귀퉁이가 접히고 색이 바랜 그런 사용 설명서.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일도 모르겠는 그런 하루에 이 두 단어는 나에게 찾아왔다.


“나 자신을 잘 활용하기 위한 사용설명서. 어디 갔었어 한참 찾았네. 이제부터는 잘 챙겨둘 것. 그리고 잘 챙겨줄 것.”




미드 굿 플레이스(The Good Place)를 보면 사후 세계가 등장한다. 사는 동안 좋은 일을 하거나 나쁜 일을 하면 그 모든 행동들이 점수로 계산되어서 그 점수에 따라 천국이나 지옥에 갈 수 있는 인간의 머릿속으로 그려낸 사후 세계의 점수 시스템은 그렇게 쉼 없이 계산된다. 그래서 우리들은 사는 동안 우리 삶이 어떻게 평가될지 늘 의식한다. 아니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는데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리고 덕분에 한참을 헤맸다. 하지만 이제는, 적어도 나에게는, 삶이란 평가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내기 위한 삶 그 자체이다. 본 적도 없는 천국에 가기 위해 점수를 쌓고 평가 항목도 모르면서 아등바등 사는 건 결코 목적이 될 수 없었기에. 그리고 그 삶을 살아가는 것도, 그 스토리를 써 내려가는 것도 실행하는 것도, 연출하는 것도 모두 나 자신이기에. 삶은 정답 없는 서술형 문제이자 스토리텔링이다. ”나를 아는 것“은 내 삶이라는 연극에 “캐릭터 설명서” 같은 거다. 없어도 살아지겠지만 더 좋은 삶을 써 내려가기 위한 경험치라 여전히 나는 현재진행형으로 헤매고 있고 아직도 나는 나를 찾아가는 그 길 위에 있다.


드라마 The Good Place 중 그동안의 인생의 모든 행동을 점수화한 이미지 (드라마 발췌)



드라마 굿 플레이스에서는 몇 가지 반전이 있다. (스포가 되기 때문에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은 이 단락을 실눈 뜨고 읽길 바란다. 사실 실눈 떠도 알 수 밖에 없지만) 신이란 존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착한 존재만은 아니라는 것, 천국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지옥일 수도 있다는 것,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고.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이 심오한 얼굴로 우리에게 ”인생“이라는 퀘스트를 준다면, 우리는 한낱 인간이라 우리들은 필사적으로 모범답안을 찾으려고 신의 표정을 살필지도 모르겠다. 정답이 한 가지만은 아니더라도 모범답안대로 그 트랙을 달려가는 삶이 그 트랙을 완주하는 자만이 멋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우리는 모범답안을 원하면서도 한 번도 의심하지 않는다. 정답이 있기는 한 건지? 정답이 1번인지 2번인지 3번인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이 문제가 주관식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는다. 로또 번호가 몇 번인지는 알고 싶고 로또에 당첨되는 행운을 바라면서도 내 눈앞에 행복에 대해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 사실 우리네 삶에 딱 떨어지는 정답 따위는 없다. 드라마 굿플레이스에서처럼 짓궂은 표정으로 아주 재밌다는 듯이 우리를 맞을지도 모른다. “내가 언제 정답이 있다고 한 것도 아닌데!” 그리고 사실은 우리네 삶에 “나”라는 사용 설명서를 인생이라는 산 “책”의 어딘가에 우리도 모르게 쓱 숨겨놓고서는 능글맞게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들아 삶이란 결과가 아니라 여정이라고, 결국엔 나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인 거라고. 그건 온전히 내 몫인 거라고. “



그래서 나는 ”내“가 외면했던 ”내“가 좋아하는 것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나하나 써 내려가고 그를 위해 내 삶의 여지를 주기로 했다. “나다움…” 내 삶이라는 종이에 누구를 위한 정답인지도 모른 채 힘주어 꾹꾹 눌러 꽉 채워 써낸 후에야 든 더부룩하고 체한 느낌. “나답다는 게 뭘까?” 고민하던 중에 아이가 생겼고 세상 모든 것이 처음인 아이와 함께 모든 처음에 도전했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마드리드 1년살이에 도전했다. 그제야 여백을 만들려면 지워낼 용기도 필요하다는 걸 그 용기를 내려면 주먹을 꽉 쥐는 게 아니라 어깨에 힘을 빼고 손을 내밀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걸 배웠다.



30살 생일 선물로 받은 그게
진짜 우울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이방인으로서 10여 년이 넘은 30 전후로 한 번쯤
내가 꼭 겪어내야 했던 성장통일지도
조금 더 일찍 한번쯤은 생각해봤어야 할
내 삶의 ”질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

내 아이덴티티 [이방인] 그리고 [INFJ(인프제)]

그리고 어쩌다 내 인생에 깜빡이도 없이 끼어든 스페인이라는 존재

마드리드 1년 살이를 통해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을 오랜 시간 고민했다.



그리고 이제는 전혀 뻔하지 않지만 아직은 여전히 오글거리는 진짜 나다운 자기소개를 하려고 한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지만 나를 가장 잘 표현한 한 문장


“안녕하세요 이방인 임프제입니다.”


어깨에 힘 빼고 용기 내어 내 삶의 페이지에서 지워낸 그 여백을 어떻게 채워갈지

매일이 설레고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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