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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임프제 Mar 27. 2024

트랙을 달리는 소녀

답 없는 인생에서 찾으려 한 나름의 모범답안

트랙 밖으로 조심스레 내딛은 나의 첫걸음을 응원해




만화영화를 보면 아니 굳이 만화영화를 찾아보지 않아도 네모난 세상 속 평범한 가정들은 꽤 많은 것을 누리고 있었다. 어린 날 나의 눈에는 돌아갈 집이 있고 나의 방과 침대가 있고 아빠가 운전해 주는 차가 있고 때 되면 밥이 나오는… 그 네모 속 일상이 평범한 보통 가족의 삶이라 생각했다. 직업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수입으로는 빠듯한 삶이었지만 창고에서 쥐가 나오던 군 아파트에 살면서도 방에는 동생과 몸을 누일 내 침대가 있었고 중고 경차였지만 놀러 갈 때 탈 차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밥때가 되면 밥 먹으라는 엄마 목소리가 놀이터에 울려 퍼지는 매일 하루. 행복이란 게 뭔지 잘 몰랐지만 이런 중간의 삶이 내일도 계속되는 평화로운 하루라고 생각했다. 참으로 순수하게도 그냥 평범하게 공부를 못하지 않으면 내가 무슨 일을 하던 중간 정도의 삶은 살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없는 살림에 이 하루하루를 유지하기 위해 엄마아빠가 얼마나 간당간당하게 생활했었는지는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아빠가 교직으로 옮겨간 이후 우리 집 형편은 조금씩 나아졌다. 반듯한 우리 집이 생겼다. 친구들 다 가는 학원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리고 사립인지도 모르고 외국어 고등학교에 가겠다고 했다. 외고에서 일본어를 처음 공부했고 동아리 활동으로 일본어 연극을 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달, 장학금 조금 준다는 말에 혹해 남들보다 훨씬 늦게 일본 유학반에 들어갔다. 뭐든 뒤쳐지는 건 싫었다. 많이 모자랐지만 누구보다 꽉 찬 24시간을 보냈다. 남들보다 스타트가 늦은 만큼 1년 동안 열심히 준비해서 일본 정부에서 주는 문부성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당시 오사카 외국어 대학교(현 오사카대학)의 부속기관이던 일본어일본문화센터에서 전 세계에서 모인 외국인 친구들과 1년간의 연수기간을 거쳐 성적을 쌓았다. 그리고 동경대에 입학했다. 아무리 우수한 성적으로 이수를 했다지만, 일본어를 배운 지 4년, 본격적으로 공부를 한 지 2년, 일본 최고의 명문 동경대의 수업을 따라가기에 내 일본어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전국에서 내놓라 하는 수재들 뿐이었다. 내가 잘하는 걸 했다. 요령도 없이 무조건 수업 내내 교수님 말씀을 받아 적어 통으로 외웠다. 늘 하던 대로 남들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일본으로 온 이후 내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더 이상 질문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 어려운 내용을 다뤄서 내가 이해하지 못할 때조차도 나는 질문하지 못했다. 내가 일본어를 잘 못해서 그런 걸까 봐. 내 부족함이 들통날까 봐… 그렇게 나는 무언가를 배우러 학교에 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다.



도쿄대학 (Unsplash)




타이틀을 얻기 위한 노력들. 그리고 내 타이틀에 걸맞는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들. 사실은 이 모든 게 그저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서 한 노력들이었다. 이 모든 것들은 그저 좋은 평가를 받아서 사회로 나가는 중간과정일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부족함에 시간과 침묵으로 대처했다. 한 달에 한 달… 거기에 또 한 달… 극내향인 성격에도 필사적으로 친구를 사귀고 어울렸다. 일본어도 나날이 나아져 이제 겨우 수업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졸업을 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나는 늘 남들보다 느렸고 버거웠다. 그리고 바로 새 직장에 입사를 했다. 요령도 없는 데다 내향적 성격 탓에 취업을 위한 준비 기간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매우 괴로웠다. 처음으로 선후배와 동기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기꺼이 손을 잡아준 덕에 겨우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렇게 나는 외자계 컨설팅펌에서 10년을 일하고 팀장직으로 퇴사를 했다.



사실은 난 늘 내가 부끄러웠고 자신이 없었다. 내 타이틀에 비해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일까 봐 늘 조바심이 났고 그 타이틀들이 거짓처럼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정말 알맹이가 없는 사람일까 봐  늘 불안했다.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더 열심히 살아낼수록 완벽의 벽에 다다르지 못해 부족한 점이 먼저 보였고 스스로를 더더 몰아세웠다. 남들이 인정해 주는 타이틀 뒤 그림자 속에는 스스로가 너무 싫어서 숨어 있는 내가 있었다. 그래도 트랙을 달리다 보면 괜찮아질 줄 알고 그렇게 트랙을 벗어나지 않고 계속 달린 지 17년, 그렇게 일본에 온 지 17년이 지났다.



(Unsplash)


정해진 트랙을 달리는 소녀.



트랙 밖에서 달려본 적이 없다. 나는 달리기 경주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단거리인 줄 알았는데 장거리였다. 버겁지만 멈추지 않고 트랙을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잘 닦아진 엘리트 코스. 그래서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버거운 채로 달려온 내가 너무 대견했다. 사실 내가 마음에 드는 나는 그저 이 사실을 오래 잘 버텨줬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끝에 뭐가 있는지도 잘 모르면서 일단 달리고 보는 트랙. 그렇게 열심히 달리다 대차게 한 번 넘어졌는데 그제야 주변이 보였다. 나 혼자였다. 그동안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질문을 너무 오래 참았다. 한 번쯤은 했어야 할 그리고 반드시 해야 할 질문들이 곪고 곪아 넘어지고 나니 이 때다 싶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트랙에 우두커니 서서 주위를 돌아봤을 때 관객석에서 날 지켜보고 있는 가족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 이 경기는 나 혼자만의 것이었다. 내가 그동안 달려온 삶, 그동안 참았던 질문에 대답해야 할 사람도 나뿐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 팀장직으로 승진을 하고 얼마 안 돼서 직장을 몇 달간 쉬었다. 아프다는 건 핑계고 쉬어야겠어서 아프다고 했고, 진단서를 끊었다. 같은 대학교 동문인 직장 선배를 오랜만에 만났다.


너 처음 넘어져봤지??
우리 학교 애들이 넘어지면 그래. 한 번도 안 넘어져봐서.
온실 속의 화초라 하면 아니라고 하겠지만 무튼 그래.
한 번도 실패한 경험이 없어서.

좀 쉬고 다시 일어나. 별거 아니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넘어지는 법을 모르고 다시 일어서는 법을 몰라서? 트랙을 달리던 소녀는 그저 이게 모범답안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뭘 위한 건지도 누굴 위한 건지도 모르면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한 삶에 대한 모범답안. 그저 올라탄 트랙에서 계속 달리는 것. 그러다 넘어지고 나니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동안 나는 내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신경을 쓰느라 가장 중요한 “나”를 놓쳐버린 느낌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수많은 질문 속에서 내가 깨달은 건 “나”를 잘 모르겠다는 거였다. 수많은 질문 들 곁가지를 모두 쳐내고 남은 한 가지 질문은 이것이었다.


이 생을 마감할 때 나는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



그리고 나의 장례식을 생각해 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는 게 싫다. 내 짧은 생을 아쉬워하는 것도 내가 이루지 못한 것들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도 싫다. 이 할머니는 참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고, 할 말 다 하고, 아쉬움 없이 간다는 말을 듣고 싶다. 그리고 오래오래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디즈니 영화 “코코”에 보면 저 세상에 간 사람들은 이승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기억과 그리움으로 살아간다. 죽은 자들의 날에 가장 화려하고 반짝이는 것들로 망자를 기억하는 멕시코 축제처럼, 내가 없는 세상이 내가 남긴 것들로 축제와 같았으면 좋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래, 남겨야겠다. 내 생각과 경험 그 모든 것들을.



두렵지만 살포시 트랙 밖으로 살포시 발을 내딛어 본다. 더 이상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는 이 트랙을 빙글빙글 돌고 있지는 않겠다고 다짐해 본다. 트랙에서 달려 나와 닦이지 않은 길을 걷다 보면 내 키보다도 더 자란 수풀을 헤쳐나가야 할지도 모르고 동네 뒷산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정글일지도 모른다. 내가 선택한 길임에도 한없이 자신 없어질 것이고 나 자신을 의심하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지난한 여정을 지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대학시절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질문하기를 어려워하던 소녀가 아니다. 다른 누군가가 해줄 수 없는 나 자신만이 써 내려갈 수 있는 이야기들을 각자의 삶이라는 그릇에 먹음직스럽게 담아내는 이 모든 과정에서 모범답안 따위는 있을 수 없다는 걸. 원래도 인생에는 답이 없기에. 이 세상 내 산책이 끝나 더 이상 내 새 글들이 쓰이지 않게 되더라도 이 글들이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의 생각들을 하루 삶에 담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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