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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리Rhee Mar 19. 2024

오랜만에 동대문 평화시장

내 마음도 평화를 되 찾네

#평화시장 #옷은 3천 원 #호떡은 1. 5백 원


남편이 일요일 아침 잔뜩 심술이 나 있는 나에게 말한다. "여보 오늘 동대문 평화시장 안 갈래? 내가 옷 사줄게! 당신이 원하는 거 내가 다 사준다." 요즘 왠지 모르겠지만 나는 가족들에게 부쩍 심술이 늘었다. 그냥 갱년기를 미리 겪느라 그러는 것 같다고 핑계를 대본다. 심술부리기도 이젠 지쳐서 그냥 고개만 심드렁하게 끄덕였다. 원래 남편을 잘 따라나서지 않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따라나서게 됐다.


동대문 평화시장으로 향하는 버스를 남편과 나는 집어 타고, 뒷바퀴 때문에 아주 높다랗게 올라와있는 좌석에 남편은 먼저 올라탄다. 키가 작은 나는 높이 올라가야 하는 좌석이 못 마땅하지만, 이상하게 그냥 군말 없이 옆에 앉았다. 남편이 기분이 좋은지, 어제저녁에 누굴 만났으며, 무슨 이야기를 했으며 조잘조잘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나는 가만히 들었다. 남편이 이야기를 하는 내내 나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한 마디도 빼 놓지 않고 다 귀 기울여 들었다. 남편이 내게 자기의 이야기를 열심히 하는 건 참 오랜만인 것 같았다. 최근 남자의 동굴이라 표현하며, 한시도 핸드폰을 손에서 떼지 않고 자기 안에 갇혀있던 남편이었다.


버스기사 아저씨께서 "이 버스는 바로 신설동으로 갑니다. 오늘 마라톤이 있어서 모두 통제예요!" 그 이야길 듣자마자 버스 승객들이 다음 정거장에 모두 우르르 내렸다. 우린 동대문까지 어차피 가야 하니까, 중간 정거장을 거치지 않고 바로 직행하여 신설동까지 가게 됐다. 마치 버스 전세를 낸 마냥 남편은 신나하면서, 와 이런 경험도 하고 오늘 너무 좋다고 말을 했다.


동대문 평화시장에 도착을 하니, 북적이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남편이 "어! 나 양말 사야 돼!" 하더니 두 묶음에 5천 원 하는 양말 좌판 앞으로 달려갔다. 두 묶음의 양말을 어찌나 이리보고 저리 보는지 5천 원을 마치 5만 원 쓰는 듯 조심스럽다. 결국엔 색을 못 골라서 내가 골라줬다. 그리고는 이번엔 핸드폰 케이스를 산다고 한다. 핸드폰 케이스가 8천 원짜리가 훨씬 나은데, 5천 원짜리를 두 개 들고 두 가지 색 중에서 골라달란다. 나는 끝까지 8천 원짜리로 고집했다. 결국엔 3천 원을 더 써서 8천 원짜리로 사게 됐다. 남편은 나직이 "내 참 내 돈 주고 핸드폰 케이스를 사보긴 처음이네!" 저쪽 골목엔 사람들이 줄이 기다랗게 서있는데, 걸어가 보니 호떡을 파는 곳이다. 1천5백 원씩이다! 보통 바깥에서는 2천 원~2천5백 원씩 하니 저렴한 편이다. 그런데 지나가던 행인이, "옷이 2천 원인데, 호떡에 1천5백 원이라니! 너무 비싼 거 아닌가?" 한다. 동대문 옷 값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싸게 느껴지는 것 같다. 남편은 운동화와 운동복 바지 한벌을 각각 한 개씩 더 샀다.




북적이며 발 디딜 틈 없는 동대문 평화시장엔 어릴 때 엄마를 따라 자주 방문을 하곤 했다.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옷 더미 안에서 보물 찾기를 하듯 옷을 옆 사람과 경쟁하며 꺼내어 봐야 했다. 옆 사람이 찾은 옷이 이쁘다 싶으면 그 사람이 그 옷을 마음에 안 들어해서 내려놓을 때까지 엄청난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옷을 몸에 대어볼 여지도 없이 손뼉 치며 발 구르는 사장님의 레이더 눈빛에 손에 든 옷 가지는 값을 치르고 자릴 떠야 했다. 동대문 건물 안에서 옷 장사 하시는 분들에게 가도 별 다를 바 없었는데, 대부분 마음에 드는 옷을 달라고 하면 '도매'라면서 안 판다고 손을 내젓기가 일쑤였다. 결국엔 눈대중으로 대강 색이랑 사이즈가 괜찮다 싶으면, 그냥 달라고 해서 검은 비닐봉지 안에 담아 오면 그만이었다. 나는 이런 쇼핑의 시간이 정말 싫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에 불친절한 상인들, 그리고 내 취향과 상관없이 시간과 돈에 맞춰서 골라지는 옷들이 집에 돌아오면 나에게 찬밥신세가 되기 십상이었다.




남편과 집에 돌아오는데, 남편은 한껏 들떠있다. "와 내 것만 샀네. 운동화 이거 정말 푹신하다!" 남편은 원래 자기한테 돈을 잘 안 쓰는 성격인지라, 오늘 이렇게 잔뜩 남편 자신의 것 을 산 것은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나마 단가가 매. 우. 저렴한 동대문이라서 가능한 일일 테지만. 나도 남편에게 티셔츠 한 벌을 얻어 입었다. 어쩌면 코로나가 할퀴고 간 상흔 때문일까? 매우 상냥하신 상인의 따뜻한 눈빛 안에서 사 든 내 마음에 드는 옷이었다.



응답하라 1988에서 부모님의 관심을 받고 싶어 가출한 도롱뇽에게 보라는 이렇게 말했다. "야! 너 신발 메이커 조던이지? 우리 덕선이는 3년째 같은 아다도스(?) 신발이야. 네 나이에 필요한 건 엄마의 관심보다는 돈이야. 관심이 필요하면 집을 나오지 말고 말을 해." 그리고 비에 젖은 아다도스(?) 신발을 걸레로 닦아서 말리는 정성 어린 모습의 덕선이의 장면이 오버랩된다. 우리 엄마라고 왜 상냥하고 깔끔한 백화점 쇼핑을 마다했겠는가. 나에게 나이키 조던을 신기기 위해 엄마는 동대문 남대문 상인들과 함께 거칠어졌던 게 아니었나. 없는 살림에 나 공부 가르치고 알뜰살뜰 절약 저축을 해온 엄마에게 쌓였던 원망이 눈 녹듯 녹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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