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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ma Yong Mar 21. 2019

이야기는 흘러 보내고 독기만 남았다 <우상>

브런치무비패스 01



예고편과 포스터를 본 사람들은 공권력을 등에 업고 사건을 은폐하려는 정치인과 자식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려는 소시민 아버지의 이야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날의 사고로 모든 것은 시작되었다'라는 카피처럼 하나의 사건으로 얽힌 사람들. 부성과 부성의 대립 속에 사건의 단서를 쥔 여인을 곁들인 미스터리가 절로 그려진다.





처음에는 <킹메이커> 같이 잘 만든 정치 스릴러를 기대했다. 지지자들에게 우상처럼 숭배되는 주인공 정치인이 선거에 걸림돌이 되는 스캔들을 권력을 동원해 저지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내부자들> 처럼 비리 고발과 개인적인 복수를 담은 모습도 엿보였다. 적어도 영화 초반 30분가량은 관람 전의 기대감과 동떨어지지 않다.


흔한 표현을 빌리자면 <우상>은 소재도 주제도 관객의 허를 찌르는 영화다. 좋은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다. 이야기가 도대체 어디로 흘러가는지, 왜 그곳으로 가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는 흐름을 가지고 있으니까.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구심점 없이 인공적으로 얽히다


잘 만든 영화는 유기체라고 볼 수 있다. 마치 살아 숨 쉬는 생명체 같다. 그에 비해 <우상>은 이야기의 구조가 작위적이다. 악어의 몸통에 늑대의 머리를 붙여놓은 인상이다.


표면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자그마한 흠결도 허용치 않는 도덕적인 이미지의 정치인 구명회(한석규)는 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람을 죽인 뒤 은폐 시도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선거에 악영향을 끼칠까 봐 아들을 자수시키지만 형량을 줄이기 위해 시체유기가 아닌 단순 뺑소니로 사건을 탈바꿈한다. 중식(설경구)은 아들이 죽고 며느리인 련화(천우희)가 사라지자 명회를 의심해 사건의 본질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줄거리를 보면 명회의 아들이 초래한 억울한 죽음이 이후 영화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구심점이 되어야 마땅하다. 명회에게 아들의 범죄는 타락의 계기이며, 마찬가지로 중식에게 아들의 억울한 죽음은 권력에 대항하게 만드는 강력한 동기부여가 된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사건은 발단 단계에만 머물러 발전하지 못한다. 영화의 진행을 돕고 주제의식을 표출하는 구심점이 아닌 다른 세상에 속한 세명의 인물을 억지로 모이게 하는 장치로써의 역할만 존재한다.



영화가 관객이 기대하는 플롯에서 벗어나 본색을 드러내는 때는 피해자의 아내이자 중식의 며느리인 련화를 찾기 시작하면서이다. 사건 이후 자취를 감춘 련화는 교통사고의 유일한 목격자로 짐작된다. 명회는 목격자를 제거하기 위해, 중식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그녀의 행방을 추적한다. 관객은 련화를 찾으면 사건의 실마리가 풀릴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련화는 남편의 죽음에 대해 새발의 피만큼 밖에 모르고 있다. 그녀는 누구보다 많은 비밀을 간직한 존재이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인물이다. 그녀가 피로 쌓아온 과거의 악행이 따라잡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갑작스레 또 다른 세계관을 만들기 시작한다. 련화의 등장으로 영화는 사건 해결의 의지를 잃고 오히려 그녀의 과거 행적에 무게중심이 쏠리는 두번째 파트로 넘어간다.



일관성 없는 세계관


새로운 인물과 플롯을 소개하면서 생기는 문제점은 영화 속 세계관이 일관되지 않다는 것이다. 괜찮은 소재와 흥미로운 캐릭터를 모아 봤으니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뽕 뽑으려는 시도로 보일 만큼 작위적이다. 명회, 중식, 련화가 각자 이끌어가는 <우상>은 하나의 영화임에도 여러 영화로 합을 맞추는 MCU 보다 세계관의 조화가 어색하다. MCU에선 각기 다른 구역과 시리즈에서 놀던 히어로들이 공통의 적의 등장을 계기로 협력하거나 대립해도 어색하지 않다. <우상>은 두 개의 상반된 시나리오를 섞은 것처럼 인물들이 따로 논다.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인물들이 모인 계기는 도의원 명회(한석규)의 아들이 저지른 교통사고와 은폐로 인한 억울한 죽음이다. 이 사건을 구심점으로 영화가 시작되고 세계관이 구축된다. 그러나 살인이 일상인 련화(천우희)의 세계가 소개되면서 기껏 쌓아놓은 내러티브 전체가 뒤틀린다. 련화의 등장을 기점으로 살인과 폭력이 흔한 일이 되어 버리니 이야기의 구심점이 흐트러진다. 결국 교통사고는 새로운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 흐지부지 결론을 내린다. 련화가 이끌어가는 이야기는 벌건 대낮에 사람을 찢어 죽이고 다니는데 법도 경찰도 권력도 도움이 되지 않는 세상이다. 련화를 노리는 살인마와 이후 진실을 알게 된 련화의 복수극은 스크린을 불쾌한 피로 물들인다. 이쯤 되면 이전의 모든 갈등은 그냥 호들갑으로 보인다. 돈만 주면 사람도 찾고 청부살인도 해주는 용역들이 널린 씬시티에서 뺑소니나 시체유기는 쉽게 해결되는 소일거리이다. 정치적 생명이 아닌 진짜 모가지가 날아가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면 영화 내내 명회와 중식이 고뇌하며 걸어온 길이 하찮게 보인다.





각자 따로 노는 주제


제목은 영화의 주제를 관통하는 키워드이다. 그렇다면 <우상>이 뜻하는 건 무엇일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 단어가 '무엇'을 혹은 '누구'를 뜻하는지 아리송하다. 이야기가 한 군데로 모이지 못하니 주제를 확립할 수 없다. 각 인물들에게서 짐작할 수 있는 단어의 정의나 목표는 공통된 주제로 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욕망이 이끄는 파멸이라는 흔하디 흔한 주제를 내세우기에는 빼곡히 쌓아 놓은 곁가지 상징주의가 거슬린다. 뚜렷한 주제를 찾지 못해 결국 모든 인물을 뭉뚱그려 포용할 수 있는 느슨한 키워드를 내세운 것처럼 보인다.


한정된 시간안에 너무 많은 이야기와 주제 의식을 담으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세 인물 각자의 세계관은 물과 기름처럼 전혀 화합되지 않고, 오히려 각자의 캐릭터가 가진 뚜렷한 설정과 목표를 해친다. 한석규, 설경구, 천우희가 연기한 인물 셋 중 한 명을 뺐으면 명확한 주제를 가진 영화가 됐을 거라 생각한다.  셋 중 하나를 뺀 상황을 가정해 나름대로 줄거리를 써봤다.


한석규 vs. 설경구

- 자식을 보호하고자 하는 그릇된 부성과 자식을 잃은 아버지가 품은 분노의 대립 (대부분의 관객이 기대했을 이야기)


한석규 vs. 천우희

- 살인 사건의 목격자를 찾아 제거하려는 정치인 명회와 끝까지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독한 생존왕 련화


천우희 vs. 설경구 

 - 아들이 신혼여행 중 시체로 발견되자 실종된 며느리를 찾아 진실을 파헤치려는 중식의 이야기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원작보다는 조금 더 정리가 된 듯하다.


차라리 TV 시리즈로 만들어졌다면 더 나은 작품이 나올 수도 있었다. <우상>이 보여주는 세계는 미드 <하우스 오브 카드>와 <파고> 시리즈의 중간쯤 되는 독특한 정치 범죄물을 시도해 볼 만한 소재다. OCN에서 제작하는 수사물 중 하나가 될 수도 있겠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이 영화가 한 드라마의 시즌 2까지 이야기를 세 시간 안에 욱여넣으려 한 야심 찬 시도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주조연의 연기와 시각 연출만큼은 훌륭하다. 특히 천우희의 연기는 <곡성>을 뛰어넘을 만큼 흡입력 있고 공포감을 준다. 폭력을 묘사하는 방식도 독기를 품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인 잔인함을 표출한다. 순간 순간 긴장하고 때때로 몰입하면서 보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이것이 전부라는 점이다. 불친절한 내러티브 속에서 힘들게 퍼즐을 맞추어도 남는 것이 없다.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걸까. 난해한 예술 영화라고 포장을 해보아도 <고도를 기다리며> 같은 부조리극이 아닌 이상 '영화의 주제는 이것이다'라고 짐작이 가야 한다.  <우상>은 순간적인 스릴만 남길 뿐 이야기와 주제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영화가 집중하는 건 이야기의 타당성이 아닌 오직 인물의 타락과 광기의 연속이다. 명회와 중식이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세계관을 구축해 놓고 그것을 열심히 부수는 데 결말 전부를 할애한다. 련화의 복수극은 이야기의 봉합이 아닌 감독의 예술적 쾌락을 위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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