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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실 May 30. 2019

가부장제 부적응자, 열린 결말을 꿈꾼다

[부부의 날, 졸혼을 생각하다] 결혼 9년 차, 내가 새롭게 내린 결론 


<부부의 날> 특집으로 오마이뉴스에서 청탁 받은 기사입니다.  부부의 날, 백년해로가 아닌 '졸혼'에 대한 의견을 쓰는 주제였고, 2주 넘게 머리를 싸맸습니다.


저도 아직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았고 설사 쓴다고 해도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을 지 자신도 없었습니다. 남편과 싸운 날엔 절망적으로 썼다가, 좀 살만한 날에는 내가 너무 했나, 싶다가 갈팡질팡 하면서 글을 몇 번이나 고쳤는지 모르겠습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현재의 제 모습이고 수준이겠지요. 다소 불쾌하거나 불편한 내용이 들어있을 수도 있으니, '부부끼리 평생 노력하면서 맞춰 살아가야지.',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부부의 날, 졸혼이라니'  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그냥 조용히 패스해주세요. 







그러려니 넘어가지 못하고 늘 '왜'라는 질문을 품고 사는 아내인 나는,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오늘 하루를 잘 살기 위해 갖은 방법을 쓰며 노력했다. 남편의 장점을 쥐어짜 떠올리거나, 내 앞에서 졸고 있는 그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거나, 집안일을 조용히 파업한다거나, 정신을 차리고 나눠서 해야 할 일을 꼼꼼하게 적어 그에게 보내곤 했다. 한편 남편 역시 나만큼이나 힘들 거라는, 위로 아닌 위안으로 마음을 다독였다. 


결혼할 당시엔 상상이나 했던가. 집안의 허드렛일들을 분배하기 위해 매일 지시하고 협상하고 타협하게 될 줄 말이다. 결혼 생활의 장점인 안정감과 결속력은 두 사람이 얼마나 호흡을 맞춰 집안일을 해내느냐(공평하게 분담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설거지, 배수구 청소, 분리수거, 이불과 옷 정리. 그리고 아이 돌보기는 시간 되는 사람이 적당히 하면 되는 일 따위가 아닌 것이었다.


처절하게 싸웠다. 9년 가까이 걸린 '남편 개조' 결과, 결혼 만족도는 60점 정도까지 올라갔다. 바닥까지 찍은 적도 있으니 이쯤이면 상당히 양호하다. 이제 남편은 '시킨 집안일만큼은' 하게 됐고, 주말에는 적극 아이를 돌보며, 가끔은 '먼저 알아서' 나들이 계획도 짠다.


그러나 기나긴 싸움에 너무나 힘을 뺀 탓일까. 집안일 문제는 한 남자에게 느꼈던 매력이나 신뢰의 상당 부분을 잃게 했다. 나는 그의 단점까지도 한없이 너그러이 포용할 만큼 '현명하고 지혜로운 여자'가 아니었으며, 그에게 '엄마' 같은 아내 또한 될 수 없었다. 


의문이 불쑥 치고 올라왔다. 나는 대체 왜 이 남자와 사는 걸까. 가끔 아이'는' 봐주니까? 생활비에 보탬이 되니까? 둘이 살면 더 큰 집에 살 수 있으니까? 아이가 아빠를 좋아하니까?


돈은 나도 벌고 있고, 대화나 취미는 친구들과도 나눌 수 있고, 하나밖에 없는 아이는 이제 여섯 살이 되어 혼자 봐도 엄청 힘들진 않다. 지금도 남편이 아이를 보는 시간은 주말에 한정됐다. 차라리 각자 살면서 주말에만 육아 바통터치를 한다면 애초에 부딪힐 일도 실망할 필요도 없을 텐데. 


대체 우리는 왜 같이 사는 걸까? 결혼생활이 힘겨울 때마다 자문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남편을 덜 미워하기 위해 화살을 나 자신에게 돌렸다. '나는 결혼과 맞지 않는 성격이야.'











가부장제 부적응자



내가 가부장제 사회에 살고 있음을 실감할 때가 있다.


남편 아침은 차려주느냐. 매일 입을 옷을 챙겨주느냐. 시가에 연락은 잘하느냐. 여자가 살갑게 대하지 않으면 남자는 밖으로 나돈다. 남자는 아이처럼 돌봐줘야 한다. 남자가 밖에서 일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여자에게 남자의 처지에 감정 이입할 것을 끝없이 강요하는 말들. 그 실체가 가부장제다. 


체제는 불화하는 이에게는 피해를 주지만 기득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적당한 당근을 주기도 한다. 자본주의가 돈을 다룰 줄 알고 자본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호의적이듯, 남자를 인정하고 '다룰 줄 아는' 여자에게도 가부장제는 꽤나 적절한 보호막이 된다.


여자가 가정의 관리자로서 역할을 얼마나 충실히 해내느냐, 군말 없이 돌봄과 감정 노동에 헌신하느냐, 남자 기죽이지 않으면서 현명하고 지혜롭게 갈등에 대처하느냐에 따라 역설적이게도 가족의 평화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체제는 이렇게 우리를 종속시키며 명령한다. '불화하지 말고 적응하라.'


그 과정이 순탄하진 않다. 많은 여성들이 가부장제에 적응하기 위해서 뼈를 깎아내는 노력을 불사하기도 하니까. 구조에 내재된 근원적 불평등함을 개인적인 수양 차원에서 애처롭게 극복해 간다. 흔한 푸념을 내뱉으면서. "매일 도 닦는 심정으로 살아요."


남편과 아내는 가족, 부부이기 전에 공동생활을 하는 동료이자 하우스 메이트다. 집은 휴식 공간만이 아니라 살림을 꾸려가는 공동의 일터이기도 하다. 서로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되 같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이만하면 됐다, 싶다가도 아내인 내가 긴장을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풀면 집안 꼴은 엉망이 됐다. 집안의 평화와 안락함은 나의 노력에 대롱대롱 달려있었다. 언제나 내가 먼저 문제제기를 하고 안간힘을 썼다. 그때마다 질문했다. 여자와 살아도 이럴까?



다른 마음이 불쑥 끼어들었다. '포기하면 편해. 남편이 돈이라도 벌어오고 사고 안 치는 데 감사하면 되는 거야. 남자의 한계를 인정하고 네가 할 수 있는 걸 열심히 해. 그러면 평온해질 거야.'  그런데 이렇게 하고 싶지 않은 나는, 가부장제 부적응자일까. 






혼자 사는 날을 기다린다


 현재 남편과 나는 사실상 육아 공동체다. 평일, 주말로 나눠 봐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아이가 아빠를 좋아하고 남편 역시 아이를 끔찍이 여긴다. 당장 남편이 없다면 나 역시도 생활에 상당한 불편을 겪을 거다. 이는 남편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아이를 사이에 두고 서로에게 의존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아이가 성인이 된다면? 그때 우리 관계는 어떻게 될까. 어떤 교집합이 남을까. 안타깝게도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서글프지만은 않다. 그때야말로 서로가 독립된 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기가 될 테니까.


나는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산다'는 결혼생활의 전제를 지웠다. 평균 수명을 60세가 아닌 100세로 보는 시대라면 더더욱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나이 내일모레 마흔, 20년을 더 사는 것과 60년을 더 같이 살아야 한다는 건 다른 개념이다.


그래서 '남자란 원래 이렇다'는 걸 인정하기보다 차라리 '우리가 언젠가 따로 살 수도 있고 헤어질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닫힌 결론을 향해 죽도록 노력하거나 체념하기보다 결말을 열어두고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함으로써 숨통을 트이기로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결혼이 죽을 때까지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예감과 기대가 오늘의 나를 더 치열하게 살게 했다. 나는 남편의 생계 부양에 의탁하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일하고 무리한 빚을 지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35년 대출로 평생 묶이는 일은 벌어져서는 안 되니까 섣부른 부동산 투자 같은 것도 하지 않는다. 그와 사는 이유가 돈 때문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남편과 정서적으로 관계가 좋지 않더라도 두렵지 않게 됐다. 한 몸처럼 붙어있는 부부가 아니라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동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걸 그와 나눠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족은 나를 완전히 충족해줄 수 없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가족을 영원의 공동체가 아닌 인생 전체의 일부분에서 협업하는 공동체라고 여기니 의외로 많은 부분에서 관대함이 생겨났다. 


부부란 무엇일까. '백년해로'라는 말은 낭만적이면서도 억압적이다. 그 말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왜 결합된 부부만을 완전하게 볼까. 독립된 개인을 온전한 주체로 볼 수는 없을까.


내년이면 결혼 10년 차다. 안정감과 동시에 불안과 불만족이 공존한다. 나는 여전히 결혼과 가부장제에 부적응 중이다. 대신 바람직한 결론을 정해두고 두려워하기보다 상상력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다. 오늘의 결혼 생활을 위해.




*비난이나 악의, 욕설이 담긴 댓글은 삭제합니다. 






*책엔 좀 더 수정된 내용으로 실려 있습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1117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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