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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실 May 06. 2021

돌봄의 시간, 나를 지우는 시간

내가 뭉개지는 어둠의 시간 속에서 타인의 느린 걸음을 받아들인다


많은 사람이 아이를 키우면서 어떤 가치를 얻는지 언급하는데, 나는 ‘나의 무가치함을 깨닫는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나 없이 생명 유지가 불가능한 타인을 돌보는 와중에, 정작 자신은 수면과 식욕조차 억제해야 하는 상황이 수백 일 동안 지속되는경험. 인정과 보상은 물론 내적 성취를 느끼기 어려운 극한의 환경을 심지어 내 돈 들여가며 하기. 그게 육아였다.


아이 돌보기, 삼십 년 넘게 살아오며 겪은 일 중 가장 어려웠다. 원래 아이를 좋아한 사람에게도 24시간 육아는 힘겨울 테지만, 오로지 자신만을 위하며 살아온 나에게 나홀로 육아가 준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쌓아온 세계가 완전히 완전히 무너졌다. 쓰나미가 휩쓸듯이.


예전 나는 목표가 생기면 계획 세우고 세부사항 다듬고 실행에 옮기고 수정하면서 한 단계씩 나아갔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내 삶을 기획할 수 있음에 의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리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더 노력을 안 하냐고 왜 더 열정을 쏟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런 내가 아기를 낳았다. 아기는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아이를 잘 길들인 능력자 엄마라면 동의 못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랬다. 주는 대로 먹고, 주는 대로 입고, 이끌어주는 대로, 가르치는 대로 한다는 그 쉽고도 당연해 보이는 모든 일이 어려웠다. 내 몸조차 마음대로 못 했다. 혼자 아이를 보는 동안 먹고 자기는 물론 좋아하는 책 읽기와 글쓰기, 운동, 친구 만나기, 돈벌이까지. 어느 것도 내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사회적 관계망이 모조리 찢겼고 발 딛고 살아온 지반이 허물어졌고 정체성이 사라졌다. 사회적 자아도 나의 이름도 지워진 채 살아가는 시간, 아이가 주는 기쁨과 행복과는 별도로 나에겐 어둠, 정지, 퇴보의 시간이었다.


언젠가 암담하고 무력한 기분을 글쓰기 선생님에게 털어놓았다. 선생님이 그러셨다.

“그러니까 네가 사람 되라고 시원이가 태어난 거야.”


사람이 된다는 건 뭘까, 아이를 낳아야 어른이 된다는 빤한 말이아니다. 사람이 된다는 건 찌그러져 있음을 겪는 일임을 지금에야 이해한다. 많은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죽을 때까지 몰랐을 거다. 우왕좌왕 헤매는 엄마들을 보며 왜 나처럼 못 하냐고 했을 거다. 내 성품상 그럴 만하다. 내가 무너져 보았기에 열등감이나 우울에 시달리는 감정도 비로소 헤아리게 되었다. 바닥을 가까스로 기어 다니며 버티는 상황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를 키워 봤다고 해서 약자나 타인을 이해하는 폭이 깊어졌다고는 말 못 하겠다. 다만 개인의 능력과 의지의 한계를 알게 되었다. 조건과 상황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걸 배웠다. 하늘을 찌르던 나의 오만은 작은 아이 앞에서 숭덩 가위로 잘렸다. 무릎이 꺾였고 바싹 엎드렸다.







@unsplash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돌봄이 여자의 성역할을 벗어나 남자들의 필수 노동이 된다면, 그리하여 어느 누구든 누군가를 돌보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게 된다면, 그 시간 동안 내가 지워지는 경험을 해 본다면 사회체제의 혁명이 일어날 거라고. 


돌봄의 시간은 보이지 않는다. 귀찮고 버겁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 그래서인지 돌봄노동은 돌봄을 필요로 하는 약자만큼이나 만만하고 취약한 대상에게 전가된다. 여성, 노인, 저임금 노동자, 또는 백수에게. 성공 가능성 높은 이들은 해서는 안 되는 천한 일인 양 취급한다.


그러나 우린 누군가의 돌봄 없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 어릴 적엔 누군가 나를 돌보았고 건강한 성인일 땐 누군가를 직접, 간접적으로 돌보고 나이가 들면 누군가의 돌봄을 받는다. 돌봄은 맞물려있다. 아무리 돌봄의 고통을 피해 가려 해도 결국 각자 몫의 돌봄이 주어지고 누군가에게 돌봄의 빚을 진다. 돌봄은 이렇듯 그림자처럼 따라다니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돌봄을 드러내면 어떻게 될까.


아이, 배우자 또는 늙은 부모를 돌보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어느 수준의 돌봄에 자신의 신체적, 정서적 헌신을 내어주고 살아가야 한다는 걸 인정한다면, 성별 가리지 않고 어릴 때부터 꾸준히 배우고 익히게 한다면, 돌봄의 시간과 노력을 꾸준히 수치화, 가시화한다면, 돈을 벌고 생산성을 높이는 다른 일과 동급으로 취급한다면, 그리하여 저마다 돌봄의 수고를 안다면.


공교육 과정에 성별 관계없이 돌봄을 경험하는 교과가 들어가면 어떨까? 성교육에 임신, 출산, 육아 정보를 극사실주의로 보여 줬으면 한다. 여성조차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모른 채 엄마가 되어 버린다. 만삭일 때 반듯이 누워 잘 수조차 없다는 것도, 자연 출산 후 2주 동안 ‘오로(惡露)’라는 피가 나와 큰 기저귀를 차고 있어야 하는 것도 모른다.


아기는 스스로 잠들지 못하며, 두세 시간마다 깨는 수면이 길게는 2년 넘게 이어진다는 사실도 엄마가 되기 전까진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다. 어떤 일을 겪는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걸까, 나만 모른 걸까.

남녀 학생 모두 아이 이유식 먹이기, 똥 기저귀 갈아보기, 놀이터에서 놀아주기 등 돌봄 실습을 경험해 보았으면 한다. 몸이 불편한 노인이나 아픈 사람을 부축해 지하철 타기도. 한 번 말고 지속적으로, 봉사 점수와 하등 관계없는 필수 코스로.


난 돌봄의 경험이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지 겪었다. 내가 변했고 내 옆의 사람도 변했다. 나의 남편은 건강한 성인 남성이자 정규직 직장인으로서 사회적으로 차별이나 피해, 불편을 직접 겪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종종 다섯 살배기 여자아이를 혼자 데리고 다니면서, 여자아이를 남자 화장실에 데려갈 일이 생기면서, 음식점을 찾아 다니면서, 공공장소에서 날뛰는 아이를 달래가면서, 끝없는 불편을 겪는다. 내가 위염에 걸려 앓아누워 있을 때도 내 앞에서 치킨을 뜯던 남편,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시켜야만 겨우 하던 남편은, 이제 아이가 흘린 콧물을 맨손으로 닦아 주고, 아이의 칭얼거림이 배고픔 때문인지 졸음 때문인지 헤아리고, 쉬 마렵다고 하면 나보다 먼저 벌떡 일어나 아이를 안고 가는 아빠가 되었다. 사람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세상을 자기 위주로 바라보지 않는다.


약자를 배려하는 태도를 배우고 자기 돌봄이 가능하도록 훈련하고 주변 환경에 대한 애정을 갖도록 하는 활동이 필요하다. 그런데 ‘군대 경험’은 돈 주고도 일부러 하면서 왜 ‘돌봄 경험’은 하지 않으려 할까. 강자에게 무릎 꿇고 복종하고 굴욕을 당하는 경험의 가치는 숭앙하면서 왜 약자를 보살피는 가치는 경시할까.


돌봄은 저임금 돌봄 서비스가 아니어야 한다. 조금 능력 있고 잘나면 외면해도 그만인 무엇이 아니라 누구나 배우고 익혀 가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저마다 돌봄을 감내할 작정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좀 더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앞에서 목발 짚고 가는 노인을 성가시다 여기지 않고, 건강 약자를 짜증 어린 시선으로 보지 않고, 뛰어다니는 아이를 눈살 찌푸리며 보지 않을 수 있을까. 동료가 돌봄의 시간을 보낼 때 언젠가 그시간이 나에게도 올 수 있음을 알고 기다려 줄 수 있을까. 돌봄의시간이 앞길 가로막는 방해물로 전락하는 일은 없어질까.


돌봄 노동을 하찮게 취급하는 사람들, 나 아닌 누군가 하면 그만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언젠가 겪을 일임을 알게 하기. 그리하여 돌봄의 시간 동안 지워지고 뭉개지고 미뤄지고 실패하는 목표, 성취, 효율을 단절이나 퇴보라고 보지 않기. 저마다 멈춤의 시간을 겪게 함으로써 세상의 속도를 늦추기. 그 시간이 가지는 가치를서로 인정해 주기.


돌봄 노동을 통해 겪는 자아 분열, 때로는 인격의 퇴행, 가시적 성장의 멈춤, ‘반성장’은 오로지 직진만을 허락하는 현대 사회에서, 오로지 긍정과 성장만을 찬미하는 발전주의 사회에서 극히 희소하고귀중한 경험이다. 내가 뭉개지는 어둠의 시간 속에서 타인의 느린걸음 또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돌봄의 시간, 나를 지워가는 시간, 그 침잠의 시간 속에서 우린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 간다.




(엄마 되기의 민낯 / 신나리 - '돌봄의 시간, 나를 지우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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