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거창한 시작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의 노래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와 '용기'에 대하여

by 차림식

'용기(brave)'는 거대한 서사 속에 갇혀있을 때가 많다. 전장을 향해 돌진하는 영웅의 기백, 전 재산을 걸고 시작하는 사업의 결단, 혹은 세상을 바꾸겠다는 원대한 선포 같은 것들 말이다. 나 역시 그랬다. 무언가 거창한 결과가 보장되어야 하거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만한 거대한 시작점 앞에서 비장함을 품고 꺼내는 것이 용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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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본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가 주는 여운은 꽤나 길었다. 상영 내내 머릿속에 줄곧 떠오른 키워드는 '용기'였다. 주인공인 그레이스는 인류 최고의 과학자 중 한 명이다. 그래서 헤일메리호에 연구원으로 탑승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앞으로의 지구를 위해 거창한 사명감을 품고 떠나지 않았다. 무섭고 두려워 도망치려다가 강제로 코마상태가 된 뒤 우주로 던져진다. 주인공 스스로도 인정하는 겁쟁이다.


스트라트의 노래 : 나를 대면하는 마음차림


그 겁쟁이들이 모인 프로젝트를 지휘하는 스트라트 사령관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지독한 실용주의자다. 인류 멸종이라는 위기 앞에서 오직 목적만을 향해 달리는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소란스러운 펍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잡는다. 해리 스타일스의 'Sign of the Times'를 부르는 그녀의 모습은 영화에서 가장 이질적이면서도 선명한 장면이다.


선택에 모든 감정을 배제한 로봇 같은 그녀는 무엇 때문에 그 순간 노래를 불렀을까?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노래를 부르는 건 그녀에게는 비효율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장면에서 진짜 용기를 봤다. 그것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가 아니었다. 거대한 과업에 짓눌려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녀는 본인을 위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행위’를 선택한 것이다.


결코 마이크 따위는 잡을 것 같지 않던 사람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시작하는 것. 거창한 미래를 설계하기보다 지금 당장 첫 소절을 떼는 것. 그것이 스트라트가 보여준 마음차림의 용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노래 속 가사를 통해 자신을 위로했고, 그 찰나의 순간에 충실함으로써 다시 나아갈 힘을 얻었다.



원대한 목표와 거창한 결과라는 함정


‘완벽한 시작’은 함정이다. 마음을 차릴 때도 마찬가지다. 내 마음의 상태가 이래야 하고, 준비는 이만큼 되어 있어야 하며, 결과는 이만큼의 파급력이 있어야 한다는 계산들. 그런 거창한 결과물들을 머릿속에 그릴수록 마음의 무게는 무거워지고, 용기는 더욱 깊은 곳을 향해 숨어 버린다.


하지만 주인공 그레이스는 달랐다. 우주 한복판에서 깨어난 그는 인류를 구하겠다고 다짐하며 용기를 낸 것이 아니다. 단지 "저 미생물이 왜 빛을 내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실험 도구를 들었다. 그는 "자, 일단 계산부터 해보자"라고 말하며 눈앞의 현실에 집중한다.


그의 용기는 미래의 결과가 아니라,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는 실행력에서 출발한다. 용기란 거대한 일을 벌이는 능력이 아니다. 두려움 때문에 멈춰버린 나를 ‘지금 할 일’ 속으로 밀어 넣는 힘이다. 거창한 결과를 꿈꾸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보다, 지금 당장 현미경 속 눈앞의 문제를 직시하는 것이 훨씬 더 본질적인 용기인 것이다.



마음차림, 지금 시작하는 그 자체


밑바닥까지 곤두박질치는 마음이 생겨날 때는 멈춤이 필요하다. 그리고 멈춤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다시 현실 속에서 무언가를 시작해야만 한다.

그 시작은 거창할 필요가 없다. 오늘 내가 해야 할 사소한 일을 외면하지 않는 것, "이게 될까?"라는 의심을 잠재우고 일단 몸을 움직이는 것. 그 순간들이 모여 진정한 용기가 마음에 차려진다.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와 두려움 앞에서도 자기 몫의 노래를 부르며 스스로에게 용기를 낸 스트라트처럼, 인류 구원이라는 거창한 목표는 두렵지만 지금 해야 할 일을 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그레이스처럼. 불투명한 미래를 걱정하기보다 지금 내 손에 쥐어진 것에 집중하려 한다.

삶을 정성껏 차려내겠다는 의지는 대단한 선언에서 나오지 않는다. 지금 할 일을 바로 시작하는 그 자체, 그것이 용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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