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저녁 일곱시 반인데 너무 졸리다. 그냥 확 자버릴까 싶어 불을 다 끄고 침대에 누웠다. 아니 이렇게 잠이 들기에는 오늘이라는 하루가 너무 아쉬워 다시 불을 다 켜고 책상머리에 앉는다. 만약 오늘 잠이 들었다가 내일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면,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이 될 텐데, 그럼 한 글자라도 더 남기고 죽는 게 남기지 않는 것보다 낫지 않겠나. 그런 마음으로 키보드의 글자를 하나하나 누르고 있다.
하나님 오늘도 하루 잘 살고 죽습니다. 내일 아침 잊지 말고 깨워주십시오. 나태주 시인이 쓴 '잠들기 전 기도'라는 제목의 시다. 문단을 그대로 붙여 쓰니 시의 말맛이 다 사라졌지만, 어쨌든 나는 매일 밤 이 시를 읊으며 잠이 든다. 매일 밤마다 잘 살고 죽는다는 기도를 신에게 올리고 난 다음날 아침이 되면, 기분이 묘하다. 아, 정말 하나님이 나를 깨워주셨네. 그렇게 새로운 오늘을 허락받는다. 나보다 높은 존재가 있다는 인식으로 그렇게 매일을 산다.
부쩍 죽음을 생각하고 묵상한다. 아마도 엄마의 뇌동맥류 진단 이후에 생긴 습관인듯하다. 뇌질환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처음에는 뇌동맥류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게 뭐예요?라고 물었다. 대학 병원에서 직접 의사를 만나는 것도 처음이었는데, 뇌동맥류에 대한 설명을 천천히 듣고 나니 더욱 혼란스러웠다. 뇌에 셀 수 없이 많이 붙어 있는 혈관, 엑스레이로 봐도 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뒤엉켜 있는데, 그중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가 막히고 부어있어서, 잘못하면 혈관이 터져 죽음에 이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다행인 것은 두개골을 열어 뇌에 통하는 동맥에 파이프를 연결하면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 두개골을 연다... 라... 네 일단 알겠습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엄마와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만큼만 살고 싶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엄마를 본다. 나 또한 나의 생명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만, 주어진 것보다 조금 더 살게 해달라고 생명을 구걸할 수도 있는 거잖아? 하지만 엄마는 그다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살아보니, 인생이 너무 길고 지루해. 너에게 피해 없는 노년을 살고 싶어. 라고 말한다. 나에게 피해가 되는 삶? 누가 누구에게 피해를 준 걸까? 마구잡이로 태어나버린 나 자신일까. 혹은 나를 낳은 당사자일까.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 영원히 알 수 없으니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인지 또한 영원히 모를 일이다.
매일같이 죽음을 생각하는 버릇과 함께 아침마다 하나님 앞에 앉는 버릇도 생겼다. 나를 깨운 존재 앞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러고는 한참을 아무 생각 없이 턱을 괴고 있거나, 테이블에 두 손을 포개고 머리를 기댄 채로 눈을 감고 한참의 시간을 보낸다. 아무 말도 아무 소리도 없이 그냥 고요한 상태로 그렇게 매일의 아침을 보낸다. 가끔은 눈물이 날 때고 있고, 졸음이 쏟아질 때도 있다. 어떤 상태든 그냥 조용히 하나님과의 시간을 보낸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에 대해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임할 때, 죽음은 더욱더 선명하게 존재를 드러낸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이고,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죽음의 존재는 사람을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것으로 만든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나님에게 아뢰어본다. "하나님, 엄마의 병을 낫게 해주시고, 부디 오래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지만 그렇다 한들 엄마는 언젠가 죽을 것이다. 영원히 살 수는 없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마찬가지다.
가뜩이나 우울한 가을에 죽음을 떠올리는 건 더욱더 우울하고 음침한 일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포장지에 리본까지 준비한다 한들 내용물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유한한 존재의 한계가 모든 생명 안에 공허를 만들고, 그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모두가 안달이 났다. 새로운 것을 임신해 낳고, 키우며 생명을 끊임없이 증명하며 살아있음을 연장하려는 눈물겨운 행위. 우리 엄마도 나라는 새로운 생명을 통해 공허를 채우려 노력했지만 살아보니, 결국 신이 허락한 만큼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결국 그 인생의 덧없음을 다른 인생인 나에게 물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