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에서 디자인 팀 리드로 일하는 방식에 대한 기록 (12)
#12. 외국계 스타트업 회사에서의 승진
10월 1일 부로 승진을 했다. 디자인팀 리드에서 크리에이티브 유닛의 리드가 되었다. 크게 달라지는 부분이 있다면 회사의 결정권과 책임을 더 많이 짊어지게 된 것. 그리고 예산을 기획하고 편성하는 일에 더 많이 참여하게 된 것이 중요한 부분이 될 것 같다. 더불어 회사의 새로운 비즈니스 기획에 더욱더 깊게 관여하여 앞으로의 새로운 먹거리를 만들어나가는 부분도 있다. 그 외 오피셜로 말할 수 없는 부분까지 포함하면 상당하다.
매니저 레벨은 코스트와 직결되어 있는 부분이 많다. 팀의 리소스를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지 프로젝트의 가격 책정은 어떻게 할지, 각 쿼터마다 예산을 어떻게 수립하고 사용할지 등등. 그리고 그래픽, 비디오, 프로덕션 등 전반적인 디자인 디렉팅도 함께 진행하게 된다. 태국, 대만, 베트남, 싱가포르, 한국의 모든 지사에서 진행하는 모든 디자인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있기에 하루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다.
무튼 승진을 했지만 지금까지 회사 생활을 하며 승진할 때마다 전혀 승진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주니어 디자이너일 때, 시니어 디자이너일 때, 디자인팀 리드일 때 그리고 이젠 디자인 총괄 매니저 일 때. 회사에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해왔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늘 ‘왜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끝없이 물었고 물어오고 있다. 모르는 게 있으면 알 때까지 물어보았고 답을 찾아 나섰다. 나 자신에게 가장 많이 물었고 팀원들에게 물었고 회사의 경영진들에게 물어왔다. 일단 내가 먼저 ‘왜’를 알아야 ‘어떻게’를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외국계 스타트업은 어떤지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외국계 회사라고 해서 무언가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진 않다. 더욱더 다양한 나라의 친구들과 일을 하는 것? 여기도 사람 사는 세상이고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실상 한국과 크게 다르진 않다. 외국계 회사도 회사 바이 회사 케이스라…
하지만 ‘스타트업’ 회사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할 얘기들이 있다. 스타트업은 시시각각 변한다. 출근할 때 다르고 퇴근할 때 다른 것이 스타트업이다. 나의 경우는 상황이 변하거나 바뀌는 것에 대해 예민하지가 않다. 그동안의 삶이 그러했고 성향이 그렇다. 대신 위에서와 같이 ‘왜 변화하는지?’는 정확히 먼저 알아야 한다. 만약 그 변화하는 이유가 정당하고 납득이 가면 따르고 그렇지 않은 경우엔 다시 되물었다. 거의 모든 상황에서 ‘왜’를 묻고 찾아보려고 했다. 그런데 때때론 바람이 불면 바람에 맞춰 흔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워가고 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한국에서 살 때 엘지전자의 디자인팀에서 일을 했었다. 이곳은 내 디자인 경력에서 가장 짧은 기간을 남긴 곳이기도 하다. 하루하루 일을 하며 느낀 것은 ‘아, 내가 이곳에서 일하면서 무언가 바꿀 수 있는 일은 일어나기 쉽지 않겠다. 과연 일어나긴 할까?’였다. 이때 정말 처음으로 내가 큰 공장 속의 정말 작은 하나의 부품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따박따박 계좌로 꽂히는 월급과 상여금 외 것들. 하루하루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것에 대한 보상은 그저 그럭저럭 괜찮은 금액의 돈뿐이었다. ‘얼마나 부려먹으면 돈을 이렇게 주겠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던 시절이다. 내 인생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는 곳이 아닐 것 같았다. 결론적으로 이때의 퇴사는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이 든다.
이와 반대로 스타트업의 경우는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무한정이다. ‘제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라는 말은 곧 내가 그 일을 맡게 됨을 의미한다. 나의 경우는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한다. 일단 해보고 뭐가 좋은지, 문제인지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하면 좋을지 찾는 과정에서 희열을 느끼는 편이다. 일은 일이고 어떻게든 결국 끝나게 되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일단 부딪혀보는 편이다.
호기심 왕성하고 에너지 뿜뿜한 리더를 만나 팀원들이 고생하는 건 아닌지 종종 의문이 든다. 하지만 13년 동안의 디자이너 생활을 돌아봤을 때 무언가 새롭게 하려고 하는 리드 밑에서 그게 무엇이 되었든 더 많이 배웠다. 나의 경우엔 새로운 일을 하되 정확한 디렉션을 갖고 팀원들을 헷갈리게 하지 않는 부분에 많은 신경을 쓴다. 그리고 팀원들이 최대한 그들의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그 외 것은 신경 쓰지 않도록 한다.
디자이너 1년 차 때가 문득 떠오른다. 디자인 작업을 하는 것보다 제본하는 일이 더 많았던 시간. 하지만 제본하면서 배운 건 선배들이 작업한 최종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이것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감을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제본 경험은 북 바인딩 할 때 여전히 잘 발휘하고 있다. 참 뭐 하나 인생에선 허투루 버려지는 게 없는 것 같다.
무튼 위로 갈수록 더 많은 결정권이 주어진다. 어깨가 무거워 늘 어깨 통증을 달고 살지만... 이 모든 게 훗날 내게 어떻게든 어떤 방식으로든 돌아올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오늘도 해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잘 해나 가보자.
뭐, 승진은 승진일 뿐. 때가 되면 때에 맞는 일을 하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엔 별로 동의는 하지 않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