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리보리 Oct 26. 2024

'왜'가 없는 인생을 살아온 30대

왜 근데 독일어 학원은 등록한거니?

아빠, 내가 서른 먹고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 학원 강의실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자리를 내가 계속 차지하는 일이야. 난 그렇게 모범생은 아니라 맨 앞자리는 싫어해. 중간이 제일 좋아. 내가 잘 눈에 띄지 않는 자리!


학원에서 내가 맘에 드는 자리 차지하는 법 2가지.

1. 일찍 가기

2. 개근하기 (누구에게도 이 자리를 맛보게 해선 안돼)


숙제를 못한 날도 있는데 들키지 않으려면 충분히 가려진 자리가 좋더라고. 파릇파릇한 20대 예비 유학생들 속에서 30대인 내가 숙제도 안한 모습을 들키기엔 좀 부끄럽기도 하고. 일을 한다는 핑계를 대기엔 내가 그 학생들보다 시간이 많은 것 같더라고. 껄껄껄...


그 학생들은 나하고는 완전히 달라. 일단 학원에 등록한 이유가 분명하거든.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으니까. 내가 대학교 다닐 때도 친구들은 나랑 달랐어. 상상하던 '대학교 로망'을 하나하나 실현해가고 그러면서 행복한 미소를 짓더라고. 나는 항상 꿈이나 로망 같은 게 없는 사람이라, 오히려 생각지 못한 일들을 하며 즐거워했어.


그러면서도 혼자 그런 질문을 했어. 어떻게 이런 로망을 미리 상상했을까? 대학 캠퍼스에 잔디밭이 있을 거라고, 거기에 앉을 수 있다는 생각조차 안해봤는데. 얘네들은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걸까? 로망을 꿈꾸는 일조차 나는 조금 뒤쳐져있다고 느끼기도 했어.


아빠, 우리 지역에서 당시 명문이었던 B고등학교에 입학했으면 좋겠다고 했던 거 기억나? 엄마랑 셋이 그 학교에 가서 탐방까지 하고 왔잖아. 부모로서 자식에게 꿈을 심어주고 싶었던 마음을 지금은 헤아릴 수 있어. 하지만 난 그 학교에 진학하지 못할 거란 걸 이미 느끼고 있었고 동시에 정말 속상하고 작아지는 기분이었어.


'난 못해'라는 말을 달고 산다며 엄마는 매번 속상해했지. 그래서 대학교에 지원할 때는 내가 정말 할 수 있는 줄 알고 터무니없이 장벽이 높은 과에 지원하기도 했지. 결국 낱알 털리듯 탈탈탈 털리고 말았지 뭐.


아빠가 알고 있을진 모르지만, 사실 나는 큰 꿈을 위해 노력하기 싫어하고 내가 무난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을 선택하는 사람이더라고. 그저 다음주에 시험이라고 하면 벼락치기하고 친구들이 떡볶이 먹자고 하면 먹으러 갔어. 난 그게 마음이 가장 편하고 즐거웠어.


아빠가 바라던 B고등학교 대신 집 근처 고등학교에 들어가 지방대를 졸업한 후 중소기업에 취직했지.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모두가 '왜'라는 질문을 던진 적도 없었고 그저 끄덕여주었어. 물론 감사한 일이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주변의 시선에서 볼 때 튀는 결정을 내린 적이 없어서 이기도 해. 그저 흘러가는 대로 손 안에 흘러오는 것만 우연히 잡아 선택했으니까. 내가 가는 길에 '왜'는 거의 없었거든. 


얼마 전 아빠 입에서 왜 독일어를 공부하냐는 질문이 나왔어.


30대인 지금도 미래를 그리지 않아. 일에 대한 열정도 여전히 부족해. 그럼에도 난 보람을 느끼고 싶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보람을 찾았는데 그게 알고보니 독일어였지. 숙제를 하고 개근을 하는 작은 행동으로도 보람과 뿌듯함을 느꼈고 나아가 삶의 원동력이 되어주었어.


이런 나에 대해 아빠는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네.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아빠가 나한테 왜 독일어 학원을 다니냐는 물음에는 그냥 한다고 했지만 복합적인 마음이 내 안에는 있는 것 같아.


30년 넘게 지내오면서 나에게 실망한 적이 많았겠지. 나도 아빠에게 실망한 적이 많았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도 많았지. 이런 깊은 얘기는 전에도 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겠고 심지어 이 글을 읽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아빠를 이해해. 그리고 키우느라 고생했고 고마워.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릴케 글, 넥서스출판)
지나온 길 톺아보기
작가의 이전글 30대 여성, 취미는 독일어 학원 개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