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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망 Jan 07. 2024

계절의 나이테

잔망레터

  


  2023년을 마무리하던 12월에, 한 독서 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지. 계절의 순환에 대한 이야기였어.


“우리 인생도 사계절에 비유할 수 있어요. 봄에는 씨를 뿌리며 확장되고, 여름엔 씨앗 중 하나를 골라 나무를 키우는 식으로 수축해요. 가을엔 열매를 추수하며 확장되고, 겨울엔 봄을 준비하며 수축하죠. 특히 겨울엔 나뭇잎을 다 떨구고 봄을 준비하는 수련에 집중을 해요. 내가 어떤 계절에 있는지 파악해 보는 것이 좋아요.”


  너는 시기적절하게 네게 와준 그 말을 인상적으로 들었어. 오- 정말 그런 것 같다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어. 네 앞에 도착하는 많은 말들에 신성한 힘이 있는 것처럼 영향을 잘 받곤 하는 사람이니까. 특히 그게 계절과 자연에 관한 말일 때 덥석 주워 담지. 정말로 그 순간, 혼란한 우주의 질서가 언어로 인해 일렬로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니까, 그치. 계절에 너를 끼워맞추는 건 본능적으로 이뤄졌어. ‘난 지금 발산하지 못하고 있으니 여름이나 겨울일 거야. 다양한 것 중 선택을 해야 할 여름일 테고, 지금은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기겠네.’ 그날부터 1년 동안 그 말을 머리맡에 둔 채, 자고 깰 때마다 떠올렸어.





  2024년 초에도 언제나처럼 루틴이 시작됐지. 다이어리와 구글 시트에 매일을 기록하고 점검하는 것. 이것들은 너의 오랜 습관이기도 하니까 올해도 뭐, 껌이었지. 다만 타이밍을 생각하며 기다릴 줄도 알게 되었어. 힘을 빼고 기다릴 때가 있다는 것. 박자를 넣을 때 ‘강강강’만을 넣기보다 ‘강’ 사이에 ‘약’을 끼워 넣는 것. 계획 강박증이 덜해졌달까. 꼭 1년 안에 무언가를 하겠다. 영어를 정복하겠다. 글 실력이 왕창 늘겠다. 건강해지겠다. 프리랜서로 자리를 잡겠다. 이런 빳빳하게 새로 다린 다짐은 예전보다 힘이 약해졌어. 다이어리에 물들인 글씨의 잉크는 생각보다 쉽게 연해져. 그게 닳고 닳아서 안 보이게 되더라도, 꼭 1년 안에 목표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마음을 곧 편하게 먹었어. 평생에 걸쳐 꾸준히 해나가고 싶은 것이 많아졌으니까. 글쓰기, 영어, 훌라는 내게 목표를 떠나서 재밌는 것들이니까.  


  다만 아쉬운 것들은 좀 오래 남아. 내 안의 원망을, 불안을 더 다스렸다면 좋았을 텐데. 그때의 너와 지금의 나는 같은 걸 아쉬워하지. 좀 더 인생을 즐기면서 살걸. 인생에 주어진 짧은 시간을 헤아려보다가 너는 까무룩 잠이 들거나 금방 다른 고민과 일거리로 넘어가거나 눈과 귀를 사로잡는 SNS에 현혹되어 버린 적이 많았어. 그것에 대해 고찰한다고 나아질지는 모르겠지만. 멈추지 않는 불안 때문에 너는 그저 글과 독서에 더 매진해 보자고 마음먹었어. 여름의 풍경을 떠올리면서. 지금의 나는 어떠냐고? 다음 계절을 준비한 네 덕분에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중심을 잡게 된 것 같아. 가을로 건너오면서 네게 빚진 게 많아. 물론 욕심처럼 대단한 글솜씨를 가진 작가는 여전히 아니지만, 좀 더 가까워졌어. 진짜 중요한 이야기와 삶에 다가가는 길을 더듬어 나가기 시작했어.




  너는 작년 연말에 새 생명을 보았어. 시누이의 아기가 미국에서 태어난 지 150일 만에 한국에 와서 그때 처음 눈을 맞춰보았어. 조카를 처음 보는 기분은 너무 낯설고 신기했잖아. 처음 만난 날, 너는 어쩐지 호들갑을 떨어줘야 할 것 같았지만 그 기대에 크게 부응하진 않았어. 너무 신기하고 경이로우면 말을 잃게 돼. 그저 아기의 눈을 고요하게 들여다보고 있었지. 그 안에 세상의 비밀을 갖고 태어난 것처럼 눈동자가 깊고 까맸어. 아기도 나처럼 금방 커서는 아파하고 또 웃으면서 살까? 그 아기는 사계절을 처음 겪게 되었지. 그러는 1년 새에 지금은 많이 컸어. 가끔 영상 통화로 보면 옹알이를 해. 머리카락도 더 길고 잘 먹어서 살도 통통해졌고. 아기가 쑥쑥 크는 것과 달리 네가 1년 새 큰 건 눈에 보이지 않지. 그 애는 새싹이고 나는 이미 커버린 나무 같아. 일정 나이가 된 후에 이뤄지는 성장이란 나이테 같은 걸까? 겉 말고 속으로 쌓이는. 안에서 흔적들이 쌓이다 못해 주름이 얼굴에 톡 튀어나오기 시작하면, 그게 내 깊이를 들여다보게 한다는 생각도 들어. 내 안에 있던 생채기와 잉여 물질이 밖으로 흘러넘치는 건지도 모르지. 그런 성장이 일어나면 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그게 기쁘기도 해.


  사실 너는 무뚝뚝해서 마음을 돌아볼 줄 몰랐고, 말을 안 하고 속으로 삭히는 것이 습관이던 사람이잖아. 그런 네가 작년부터 조금씩 언어를 갖기 시작했지. 20대 때는 흥청망청 놀러 다니고 회사에 갇혀 있느라 네게 언어가 있다는 것도 몰랐었어. 네가 말하고 글 쓰는 걸 시작한 덕분에 지금의 나는 상처들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는 상태야. 부모님에게 그런 속마음을 담은 편지를 준 것도 잘한 일이야. 관계에 균열은 좀 생겼어도 언젠간 해야 할 말들이었어. 그제야 너는 상처에서 거리를 두고 널 성장시키기로 선택한 거야. 미래의 내게 뒷일을 맡기고 지금 네가 할 일을 하도록 해.




  너는 겁이 많아서 함정에 빠지는 걸 끊임없이 두려워했지. 자기 연민에 빠지진 않을까. 무기력, 피해 의식에 빠지지 않을까. 길이 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될까 봐 끊임없이 점검해 왔지. 지금의 나도 그래. 근데 오히려 이곳저곳에 함정이 많을수록, 제약이 많을수록 장점도 있다니까. 결정하기가 한결 편해지거든. 애초에 선택지가 적으니까. 더 윤리적인 선택을 해야겠구나, 내 통제 범위에 있는 게 많지 않구나, 다 가질 수 없구나… 이걸 새기는 과정이 성장 같기도 해. 나이테가 늘어나는 식의 고요한 성장. 지금 나는 여전히 겁이 많지만 전보다 편하고 즐거워졌고, 미래가 조금씩 기대돼. 너와 내가 같이 만들 미래의 나 말이야. 아직 오지 않은 그 사람. 사계절을 건너면 금방 만나게 될 사람. 누군가와 함께, 때론 혼자 걷다 보면 거기엔 더 나은 인생이 있진 않더라도 더 성장한 내가 있을 수 있겠지. 하나씩 늘어갈 우리의 나이테는 어떤 모양일까? 우리는 어떤 계절을 맞게 될까?



*독서모임 : ‘지금의 세상’의 독서모임. 독립서점 ‘지금의 세상’에서 현정님이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들은 얘기를 인용했습니다. (사진 출처 : 현정님)


**이 글은 까불이글방에서 글감을 받아서 쓴 이야기입니다. 미래의 제가 과거의 저에게 편지를 쓰는 형태의 글이죠. 까불이글방은 제 글쓰기 스승 양다솔 작가가 운영하는 글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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