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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운 Dec 21. 2023

몸 세미나 후기

특강 교수님께 보낸 편지

Piun © photography

1학차 마지막에 특강이 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제가 추천한 교수님의 공황장애 관련 강의도 진행되었고, 이어서 몸 세미나가 진행되었습니다. 몸 세미나를 참석한 후 세미나를 진행해 주신 교수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귀한 걸음 해주셔서 저에겐 소중함 그 이상의 시간이었습니다. 교수님께 이렇게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어 적어 내려 갑니다. 저는 사진을 하고 있어요. 패션사진을 촬영할 때는 간혹 몸을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대체로 사진은 낚시하듯 움직임이 크지 않은 작업이긴 합니다. 춤이라고는 춰 본 적도 없고, 누구 앞에서 몸을 움직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몸치입니다. 그래서 몸이 굳어 있어요. 스트레칭이라도 해야 하는데 말이죠. 원우들 대부분이 여자 선생님들이기도 하고, 몸을 써야 하는 워크숍이기에 참석을 조금 망설이긴 했습니다. 저와는 상관없는 분야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교실밖에서 교수님을 스치듯 뵙고 이끌리듯 참석을 결정하였습니다.


‘춤이 이런 건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마지막에 말씀드렸었죠? ‘춤’은 전혀 모르지만, 그렇게 느껴졌어요. 눈을 감고 파트너의 손 끝에 저를 맡기고 공간을 이동할 때 저는 춤을 추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죠. 오로지 발끝이 닿는 곳과 나의 손이 확장하는 끝이 느껴질 뿐이었어요. 발은 바닥을 부드럽게 스치듯 좁지 않은 범위로 번져 흩어졌고, 저는 다른 공간에 와 있음을 느꼈어요. 교수님께서 그만할 것을 안내하지 않아도 다들 음악이 끝날 때 자연스레 동작을 멈추었어요.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내가 춤을 추고 있구나’ 심지어 눈을 감고 다른 이의 손 끝에만 의지해서 ‘내가 춤을 추고 있는 거구나’


파트너를 리드할 때는 더욱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내가 눈을 뜨고, 파트너의 안전을 위해 잘 이끌어 줘야 하는 위치인데, 눈을 감아버리고 뒷걸음치며 이동하는 저를 느끼고 눈을 다시 크게 떴어요. 부딪힘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어요. 그저 그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은 부딪히지 않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의 정해놓은 규칙 있는 놀이처럼 느껴졌어요. 눈을 감으나 뜨나 움직임에는 변화가 없을 것 같았고, 다른 선생님들도 그런 규칙으로 나를 피할 테니, ‘조금은 더 자유로워져도 우린 충돌하지 않을 거야’라는 믿음이 작용한 것 같아요.


동작은 점점 커지더군요. 눈을 감고 움직이라고 하셨을 때, ‘이게 가능해?’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어요. 마치 로봇청소기가 된 듯 예민한 감각을 살려 살짝 부딪히면 바로 멈추어 방향을 틀었죠. 오로지 나의 신체 감각에만 의존해서 나의 안전한 움직임을 보장해야 했기에 가장 외부에 있는 나의 팔과 어깨 엉덩이 발끝의 감각이 예민해짐을 느꼈습니다. 사진 현상을 위해 암실(Darkroom)에 들어갔을 때의 절대적인 어둠이 느껴져서 살짝 두려웠어요. 눈을 감았지만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느껴지는 여백은 빛의 명암으로 아주 미세하게는 전달됨을 느꼈어요.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떠올랐어요. 작은 세션이 끝나면 서로가 느낀 감정을 말로 표현하고 싶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교수님께서는 말없이 느낄 것을 말씀하셨죠. 몸의 움직임을 통해서 언어 밖 세상을 탐험하고 돌아와서, 말로 그 세상을 표현한다는 것은 꿈을 이야기하듯 어눌할 것이고, 비교적 잘 표현해서 이해가 되었다고 하면, 그 역시 그 세계를 잘못 이해한 꼴이니, 말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 말은 꿈에서 깨어나게 하는 영화 인셉션의 ‘킥’과 같은 것이 되어 버리니까 말이죠. 고등학생 때 보았던 발레공연이 생각났어요. 한마디의 말도 없이 오로지 몸으로만 이야기를 전달하더군요. 커튼콜이 끝나고 무대가 암전 될 때까지도 아무 말이 없었죠. 움직임에 대한 어떠한 평가나 해설 없이 진행되었던 세션에서 그때의 발레공연이 떠올랐습니다.


교수님과의 몸 세션이 끝나고,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결승무대가 다시 떠올라 그가 전해준 감동은 소리만이 아니었음을 느꼈어요. 그래서 역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연주 영상을 몰아서 봤어요. 저의 막귀로는 그 소리의 차이로 감동을 구분할 수는 없었어요. 하지만 임윤찬의 연주에서 저는 피아노가 표현할 수 없는 그 한계 상황을 몸으로 표현하는 진정성을 보았고, 그 한계에서 몸부림치는 아티스트가 저를 울게 만들었구나 생각했어요. 마크로스코의 작품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울었다고 하는데 그 영적 체험이 무엇인지는 알 것도 같고, 왜 마크로스코가 단순히 자신의 작품을 추상작품으로 불러지길 원하지 않았는지도 이해가 되지만, 제가 그 느낌을 체험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한 체험이 가능하다는 것을 ‘사진’이란 매체를 통해 꾸준히 전달하고 있지만, 정작 저는 온전히 그 영적 영역을 경험 하진 못했어요.


교수님의 수업내용에 붙이는 특별한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몸의 움직임이 ‘마음 챙김’ 요법과 다르지 않아 보였어요. 의식의 흐름 속에서 의식적인 생각이든지 의식으로 떠오른 정서적인 것이든 무엇이든지 붙잡아 내려놓음으로써 온전히 지금 이곳에 머물게 하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고자 하는 ‘마음 챙김’ 요법과 그 형식적인 접근법은 다르지만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다르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눈을 감고 몸을 움직이자 그 몸의 흐름에 자연스레 집중하게 되고 어떠한 상념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프랭클의 의미치료에서 말하는 역설적 의도 paradoxical intention와 탈숙고 deflection가 의도 intention의 전환 혹은 내려놓음으로써 불안을 떨쳐버리고자 하는데, 몸을 움직이니 모든 것이 자연스레 어떠한 의도를 하지 않아도 이루어짐을 느꼈습니다. 몸의 감각기관에 집중한 게슈탈트 치료법 역시 감각기관의 반응을 통해 상담자는 이면의 정서를 알아채고 더 깊은 곳의 진정한 욕구를 내담자 스스로 인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인데, 몸을 움직이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의 감각이 살아남을 느꼈어요. 물론 그것이 현실적인 내면의 욕구를 어떤 식으로 끌어올리고 알아차리게 되는지 까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교수님과의 몸 세션 자체에서 저는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졌고, 눈을 감고 움직였던 나의 동작들을, 나의 이미지들을 사진으로 또는 영상으로 기록하고 싶은 충동도 느꼈습니다. 물론 눈을 감았을 때 떠오르는 나의 움직임은 기록할 방법이 없긴 하지만요. 어린 시절의 기억 중에 나의 모습이 사진처럼 기억되는 장면들이 있잖아요? 마치 그런 기억처럼 눈을 감고 몸을 움직일 때 그 모습이 제삼자의 관점으로 그려지더라고요. 아마 제가 누군가의 동작을 촬영해 주면 그 사진을 힌트로 삼아 그분은 자신이 그렸던 머릿속의 그림을 다시 떠올릴 수도 있겠죠? 힌트를 담는 것이 사진이기도 하니까요.


‘몸’, Kinetic movement, 현상학

대학원에서 예술치료 공부의 첫 학기가 끝이 났고, 그 마지막 날에 교수님과 만났어요. 우연이지만 필연적인 만남이겠죠. 임상 현장에서 관찰자로 참여했어요. 느낀 점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우연한 움직임 속에서 포착하는 하나의 필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이들의 예술표현 활동이 치료적 활동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스쳐 지나가는 그 행동들의 필연적인 요소들을 ‘알아차림’ 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어요. 쉽지 않은 일이죠. 순간 포착을 잘하는 사진가의 사진에 우리가 매료되듯 ‘알아차림’은 ‘작가적 시선’을 갖추었을 때 발휘되는 능력일 수 있겠다 싶어요. 연속된 우연 같은 움직임도 사실은 필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움직임을 통해서 살아있음을 느끼고, 그렇게 현재를 살아가잖아요. 멈추어버린 것은 ‘죽음’으로 받아들이고요. 그래서 사진은 찍는 순간 ‘죽음’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죠. 사진을 한다는 것은 늘 죽음에 직면하게 되니, 실존적인 물음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고요. 그래서 실족적인 심리치료를 더 공부하고 싶고, 사진매체를 더 적극 활용하고 싶은 것 같아요. 그런데 교수님과의 몸 세션을 통해서 로저스가 말하는 ‘현상학적 있는 그대로의 수용’이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해요. 과거에 대한 선입견을 모두 내려놓고 지금 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내담자의 유기체적 경험을 온전히 그대로 수용하라고 하는 그 말이 단순히 우리가 말하는 공감의 의미를 넘어서 있을 터인데, 상담현장에 적용해 보면, 그 말은 예술가의 ‘작가적 시선’이라는 진정성과 맞닿아 있는 듯하니,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교수님과의 세션 이후로 몸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몸’의 움직임으로 시간을 느끼고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작가적 시선으로 어떤 한순간을 포착하는 사진처럼 연속된 몸의 움직임 속에 떠오르는 필연을 사진으로 담고 싶은 충동에 휩싸입니다. 그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몸에 대한 실존적인 물음일 것이고, 살아있는 유기체를 사진으로 죽음 앞에 직면하게 하고, 그 죽음을 직면한 유기체의 또 다른 움직을 추적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라져야 완성되는 설치미술(installation art)의 철학적 깊이가 흘러가듯 사라지는 몸의 움직임과 연결됨을 느낍니다. 그 흐름 속의 어느 한순간을 왜 사진으로 포착해야 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죽음의 직면’과 ‘스스로 그린 몸의 표상에 대한 힌트’ 정도의 의미는 떠오릅니다.


Piun © photography

교수님과의 몸 세션 이후 떠오른 많은 생각들을 파편적으로 적었습니다. 적고 보니 특강 해주신 교수님에 대한 감사의 편지인지 수업 후 리포트를 제출하는 것인지 헛갈리긴 합니다. 아무튼 몸치인 제가 그렇게 눈을 감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에 매우 놀랐습니다.  한 학기 동안 예술자체의 힘과 예술매체 간의 창조적 연결과 역동을 공부했어요. 왜 마지막 특강 수업으로 '몸 세미나'가 기획되었는지 그 뜻을 짐작해 봅니다. 공부해야 할 폭이 확장되었습니다. 실존+몸+사진을 연결하는 치유프로그램에 대한 고민은 물론 개인 작품 활동에 대한 설렘도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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