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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운 Dec 07. 2024

[책/전시] 노탄 Notan

필립 퍼키스 Philip Perkis @류가헌갤러리

Notan : 노탄 : 농담 濃淡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농담(노탄 Notan)은 필립 퍼키스 Philip Perkis 사진작가의 마지막 책이 될 것 같습니다. 그 마지막 여정을 함께했습니다. 책이 세상에 나오기 전 Notan을 먼저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책의 최종 검수작업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2024년 11월 30일, 그의 책과 사진이 전시되는 서울 류가헌 갤러리에서 패널로 참여하여 그에게 나의 말을 전합니다.

@ryugaheon

2024.11.30, 16:30~18:00

패널로 참여했습니다. 필립퍼키스 사진작가의 마지막 책 출간을 기념한 전시회에 소중하게도 패널로 초대되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한다는 생각에 설렘과 긴장, 그리고 헤어짐의 슬픔이 공존했습니다. 이제야 그에게 내 목소릴 전하게 되었는데, 만남은 헤어짐과 붙어버렸습니다. 노탄은 그의 마지막 작품집이 될 테니까요. 늘 세상을 비닐 위에 밀착시키는 작업이 사진입니다. 만나게 되는 세상은 그 순간 비닐 위에 밀착되고 이네 죽음으로 헤어집니다. 노탄 Notan ( 농담 濃淡 : 짙음과 옅음, 어둠과 밝음 의 일본식 발음)으로 책 제목이 정해졌을 때, "그래, 마무리구나!" "완성이겠어", 안과 밖의 세상이 밀착되어 그 미세한 틈사이로 에너지가 오고 가는구나 싶었습니다.

5개의 소고

그중에 하나를 맡았습니다. 청중에게, 멀게는 필립 퍼키스에게 그날 조용히 전했던 나의 말을 이곳에 담담히 기록해두려 합니다. 박태희, 최용호, 이정현 이렇게 세분의 필립 퍼키스 제자분들과 다큐멘터리 사진가 한금선, 사진을 음악으로 승화시키는 박재현 사진가와 함께 필명이 아닌 본명으로 그에게 나의 말을 전했습니다.


© piun 자화상 : 밀착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공감하고 싶은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 그 말들을 되뇌며 전시장을 찾았습니다. 바로 앞서 발표한 이정현 선생님이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 In a box upon the sea] 책의 마지막 구절을 낭독해 주실 때, 'This is Notan'이라고 외칠 뻔했습니다. 소장하지 못한 책 속의 구절은 귀를 쫑긋 세우게 만들었습니다.


이정현 선생님은 초면이었습니다.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발표는 진행되었고, 선생님의 발표가 끝나자마자 무례함을 무릅쓰고 '책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한번 낭독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렇게 저를 소개할 생각도 못하고 바로 발표를 이어갔습니다. 청중들과 함께 다시 한번 마지막 문구를 듣는 것으로 공감하고 싶었고, 필립 선생님께 속으로 '이거 맞죠?'라고 질문하고 있었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숨표/ pause 가 많았던 나의 발표였습니다. 여백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에 맞닿을 땐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업사진을 강의할 땐, '제 말이 너무 빠르면 말씀해 주세요'라고 청중들의 눈치를 살피곤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숨을 멈추고 청중들의 눈빛을 살폈어요. 한분이라도 멈추어 있는 이 시간 속 공간에 눈빛을 던져주는 분이 계실까 싶어 두리번거렸죠.


찰스 올슨 <인간계> : Just to see a mystery 그저 바라보는 것의 신비 (다큐멘터리 영상, 20분 49초)

내가 필립퍼키스의 사진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시작한 건 20분 49초 그 지점 때문이었어요. 필립 선생님은 찰스 올슨의 <인간계>라는 essay을 인용했어요. 우리가 언어에 의해 어떻게 직접적 경험으로부터 멀어지는 지를 논하고 있다면서, 언어가 대상들을 추상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다음장면은 '컵'을 들고 설명하죠. 상업사진학교 브룩스 대학원 수업 때의 일화가 연결되는 장면이었어요. 나의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거장의 영상은 필립퍼키스의 사진에 드디어 관심을 갖게 만들었어요. 개인적으로 작가노트가 지나치게 화려한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입니다. https://brunch.co.kr/@piunphoto/15

Just to see a mystery 그저 바라보는 것의 신비 (다큐멘터리 영상, 20분 49초)


[책]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

아주 얇은 책이 하나 있어요. 필립 선생님의 사진집 <인간의 슬픔> 서문의 번역본도 실려있어요. 비평가인 막스 코즐로프 MAX KOZLOFF가 서문(마음의 처소들 occasions of the mind)을 통해 필립 선생님의 사진세계를 소개하고 있어요. 막스 코즐로프는 프랑스 예술가 장 콕토 (Jean Cocteau)의 말을 인용해서 언어를 벗어난 세계에 대한 직관적인 관찰을 담담히 담아내는 필립선생님의 사진세계를 짚어주고 있어요. 

"식물이 원예학에서 토론할 수 있는 가능성보다, 예술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적다." (장 콕토)


'작품에 대한 의미나 해석에 저항한다.'라고 필립 선생님의 사진세계를 말해요. 


사실, 필립 선생님의 이러한 관점과 접근법이 개념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것을 실천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죠. 지구반대편 세상과 이젠 시공간이 붙어버린 세상에 살고 있죠. 대부분은 우리들의 개념어로 채워진 그다지 신기하지 않은 세상입니다. 무엇을 관찰해도 우리는 그것을 언어로 명명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어요. 언어를 빼고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언어이전의 세상을 살았던 유아기 시절은 기억도 없고요. '컵'을 보고 우리는 관찰과 동시에 이미 '컵'을 알죠. 기존에 알고 있는 지식과 직간접 경험을 버무려 나만의 해석으로 컵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컵'이라는 개념어를 벗어나 그 사물자체를 온전히 그대로 관찰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죠. 사진에서 흔히 말하는 '낯설게 바라 보기'가 바로 언어를 벗어난 사진적 시선 훈련이라고 볼 수 있어요.


언어를 벗어난 세계에 대해선 많은 예술가와 비평가들이 힘주어 말하고 있어요.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에 나오는 이름 없는 집짐승, 반려견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던 페터 한트케, 작품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던 마크로스코, 자신의 작품을 추상화로 규정하는 것조차 싫어했죠.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논리 철학 논고> 마지막 명제로 주장한 비트겐슈타인,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사진이 좋은 사진'이라고 말한 롤랑바르트, 형식적인 세상을 담아낸 '스투디움'과 자신만의 표상을 담아낸 '푼크툼'이란 개념으로 유명하죠. 그리고 언어를 벗어난 대상 그 자체의 관찰을 조언한 필립 선생님까지 자신의 분야에서 다른 식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고, 저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노탄에 관하여...

필립 퍼키스의 사진은 고립된 무언가를 찾아 노탄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필립 퍼키스의 사진은 내 안의 무언가를 바깥세상을 통해 '알아차림' 하는 과정이란 생각이 들어요. 삶 속에서 깨진 패턴을 찾고 있다고 생각해요. 세상 속 논리가 흐트러진 순간인 거죠. 상업사진 학교에서도 '패턴'을 찍어오라는 숙제를 한 적이 있어요. 사진을 처음 배우면 세상 속에 존재하는 대상의 패턴을 찾는 눈훈련도 하는데요. 잘 찍은 사진이라고 칭찬을 받고 싶다면 형식적인 일정한 패턴 속에서 패턴이 어긋난 부분을 사진에 담으면 됩니다. 내 안의 세상과 이곳 현실의 세상은 분명 다른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꿈속에선 논리적이었는데 현실에선 말로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경우를 떠올려보면 비슷해요. 내 안의 세계와 이곳 세상이 만날 수 있는 현실 속 논리가 깨진 틈을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필립 선생님은 삶 속에서 깨진 패턴을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을 막스 코즐로프는 <인간의 슬픔 the sadness of men, 서문>에서 '고립(isolated)'이란 표현을 사용해요.


Perkis has a highly developed consciousness of what is contained and not contained. Instead of through events or stories, attention is caught by an isolated presence. - MAX KOZLOFF 
필립 퍼키스는 프레임 안에 무엇을 포함시켜야 하고 무엇을 빼야 할지 고도로 의식하고 있다.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사건이나 이야기가 아니라 고립된 존재들이다.


노탄(Notan)은 개념적이고 합리적인 조화가 아닌 꿈과 현실의 중첩된 밀착된 조화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아요. 책의 표지에도 일본의 디자인 개념으로써 노탄을 소개하고 있어요. 검은색과 흰색만을 이용해서 시각적으로 균형과 대비를 강조하는 기법이죠. 흰색과 검은색이 한 발씩 양보한 조화로운 회색을 말하지 않아요. 개별 정체성을 잃게 되니까 말이죠. 꿈과 현실이 섞일 순 없지만 현실 속 어떤 패턴이 깨진 틈사이로 연결될 수 있을진 모르겠어요. 그때 일어난 소통의 순간 필립 퍼키스는 '찰칵'하는 것 같습니다.


내면과 외부 현실의 대등한 중첩!, 막스 코즐로프 <인간의 슬픔, 서문> 마지막 단락에서 이걸 '밀착'이라고 했어요. 동의해요.  세상에서 '고립'을 찾아내면 그때 셔터를 눌러 밀착된 내면과 세상을 비닐 위에 밀착시켜 사진으로 담아요.


모든 훌륭한 사진들을 보고 난 후처럼, 나는 열린 결말을 가지고 이 책을 덮는다. 어떤 신비로움도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그가 말한 대로 "관찰을 통해 감정의 질을 있는 그대로의 대상과 더 욱 밀착시킬 수 만 있다면." 세상과 공감하는데 열정적인 우리의 사진가는 자신의 사진집을 인간의 슬픔이라 명명함으로써 그의 경험을 확실하게 요약해내고 있다.
I come away from this book, as I do from all good photography, aroused by its inconclusiveness There needn't be any mystery about it, provided the photographer brings "the emotional content closer to the observation.' Perkis is vigorous in his empathies and sure of his experience, which he summarizes by calling his book The Sadness of Men. - MAX KOZLOFF 


내면과 외부세계는 밀착되어 나타나고, 뭐가 더 중요한 건 없어요. 둘 다 같은 중요도로 다른 세상에 각기 존재해요. 밀착가능한 그 순간을 사진에 담을 땐, 구도도 생각하고, 노출도 생각하죠. 앵글 각도도 생각하겠죠. 순간이지만 치열하게 말이죠. 사건이나 이야기가 고립된 존재를 방해하면 안 되겠죠. 필립 퍼키스의 사진을 보면 주인공을 찾기 힘들어요. 사진 속 사건과 이야기는 무의미하죠. 주인공을 찾았다 싶으면 사진 속에서 작은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고립된 존재예요. 크게 도드라져 보이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주인공이 아님을 또 다른 고립을 통해 확인하게 되죠.


깨진 세상의 틈을 찾아 내면과 밀착하는 작업이 그의 사진이고,

이것이 그가 말한 '노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류가헌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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