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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카이워커 May 01. 2023

계획과 무계획 사이, 원주 여행

어떤 무계획은 상대방을 배려하다 짜여버린 계획이 아닐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긴 큰 변화 중 하나는 점점 계획적인 인간상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원체 본능과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라 계획대로 이행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사람이지만, 살면서 숱하게 저지른 실수는 모두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깨닫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계획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번 원주 당일치기 여행은 또 한 번의 '실수'였다. 주목적은 안도타다오 전시회가 열리는 뮤지엄산에 방문하는 것이었고, 나머지 시간은 오랜만에 서울이 아닌 곳에서 맛집도 가고 카페도 방문하고 여유를 즐기기 위함이었다. 얼리버드 티켓 예매, KTX와 쏘카 렌트까지 다 해놨고, 뮤지엄 산까지의 경로, 아점으로 포장해 갈 김밥집까지 알아놨다.


사실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간대별 동선과 식사할 곳, 중간에 휴식할 수 있는 카페까지 알아봤어야 완벽한 계획일 것이었다.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기가 막힐 맛집은 나오지 않았고, 전시회 다녀온 이후 남는 6시간 동안 가볼 만한 곳은 없었다.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가보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계획하길 포기했다.


그때 노선을 아예 바꿔 반나절짜리 여행으로 일정을 변경했더라면. 차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시간을 때우지 않았을 테고, 겨우겨우 찾은 고깃집의 형편없는 식사에 실망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충동구매한 도나쓰를 먹지도 못하고 뜨거운 차 안에 방치하다 결국 버리게 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뮤지엄 산 방문까지는 좋았다. 입구부터 전시회의 시작을 알리는 정갈하게 다듬어진 오솔길, 파란 하늘,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과 강렬하게 대조되는 빨간 아치웨이, 그 모든 것을 거울처럼 반사시키는 호수 같은 워터가든, 산을 전경삼아 휴식을 즐길 수 있는 미술관 내 카페, 구석구석 빛의 방향을 따라 빈틈없이 설계된 안도타다오의 가치관이 들어간 건축물. 모든 것이 경이로웠고 아름다웠다. (안도타다오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더 자세하게 써보겠다.)


미술관 구석구석을 두 시간 반 동안 탐방하고 나왔는데도 겨우 두시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애매하게 이것저것 주워 먹은 탓에 배는 고프지 않았고, 드라이브 겸 바로 옆 도시 횡성으로 가기에는 운전에 대한 부담이 컸다. 결국 가장 만만한 카페를 선택, 월송 카페라는 산속의 고요하고 아담한 장소를 알아냈다. 카페는 좋았다. 적당히 한적하고 경치도 좋았고 음료도 맛있었다.


그치만 마냥 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충분히 쉬었는데도 KTX 시간까지는 무려 4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와서 도랑을 건너 맞은편 캠핑장도 가보고, 도랑 옆 자갈길도 걸어보고 했지만 시간이 안 갔다. 다시 차를 타고 이번에는 아예 주민들이 사는 듯한 마을에 들어가서 대충 잔디밭 위에 주차한 뒤 노래 들으며 시간을 때웠다.


전시회는 좋았지만 이 무슨 사서 고생이냐, 돈낭비 시간낭비라고 툴툴거리는 나에게 짝꿍이 넌지시 말했다. 원래 여행은 계획대로 안 하는 것이 여행 아니겠냐고.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었다. 여행에서 만큼은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만 맛볼 수 있는 예상치 못한 즐거움이 있었다. 충동구매로 산 기념품, 보이는 곳 아무 데나 들어갔을 뿐인데 엄청나게 맛있었던 음식점, 아주 작은 우연으로 인연을 맺은 친구들.


생각을 바꿔먹으니 약간은 즐길 수 있었다. 조금은 무계획이어도 괜찮다. 원래 여행은 그러려고 가는 것이니. 여기가 원주가 아니라 해외라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낭만적이지 않겠는가?


마음을 바꿔먹었음에도 고민하고 또 고민해 고른 저녁 식사가 만족스럽지 못하여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를 타고 원주 시내를 빙빙 돌며 여차저차 시간을 때워 청량리행 KTX 시간까지 버틴 우리가 대견했다.


여행 끝에 남은 것은 예산 초과로 또 한 번 뚫려버린 통장잔고와 허탈한 웃음, 그리고 교훈이었다.


첫째, 계획을 구체적으로 짤 것.

둘째, 갈 곳이 없으면 빠르게 계획을 변경할 것.

셋째,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우물쭈물하지 말고 자기 의사를 확실하게 표현할 것.


그렇다. 우리의 무계획은 어떤 점에서 상대방을 배려하느라 만들어진 계획이었다. 우리에게는 여행을 변경할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상대방을 배려하느라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제안들이 있었다.


'원주에 더 할 게 없을 것 같은데 그냥 전시회만 보고 돌아갈까?'

'점심을 간단하게 때우기보단 제대로 된 밥을 먹는 게 어때?'

'도넛츠는 못 먹을 것 같은데 다음에 사는 게 어때?'


어떤 고민들은 상대방을 위해 머뭇거리기보다는 표현할 때 더 가치 있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실망하지 않는 자세다. 어떤 즐거움은 무계획에서 오기도 하니까.


계획과 무계획 사이 원주 여행, 무계획으로 빚어진 실수였지만 좋은 배움과 소중한 추억을 얻었으니 성공적인 실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p.s. 정말로 가끔은 무계획이어도 괜찮다. 이제는 계획을 짜야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훈련을 해보자.


원주역 도착 하자마자 충동구매한 복숭아빵. 정말로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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