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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物 사물을 관찰하다. / 李穡 이색

by 노정

觀物 사물을 관찰하다. / 李穡 이색

大哉觀物處 위대하도다 사물을 관찰하는 곳에는

因勢自相形 형세에 따라 스스로 제 모습 드러내네

白水深成黑 맑은 물도 깊으면 검은빛 되고

黃山遠送靑 누런 산도 멀어지면 푸른색을 보내네

位高威自重 지위가 높으면 위엄은 절로 중하고

室陋德彌馨 집은 누추하지만 덕은 더욱 향기롭네

老牧忘言久 목은 늙은이 말을 잊은 지 오래인지라

苔痕滿小庭 작은 뜰에 이끼 흔적만 가득하네


이 시는 고려 말의 대표적 학자이자 관료인 李穡(이색)의 시로, 제목은 「觀物 관물」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자연과 일상의 사소한 대상들을 가만히 관찰하며, 그 속에 담긴 보편적 진리와 자기 성찰의 계기를 끌어낸다.

이 시의 수련에서는 사물을 관찰하며 느끼는 시인의 감회를 ‘위대하도다’라는 감탄으로 먼저 드러내며, 시 전체의 주제를 제시한다. 이어서 시인은 사물이란 저마다 놓인 형세에 따라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이는 사물이 고정된 본질만을 지니는 존재가 아니라, 관찰되는 조건과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로 인식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시적 사유의 출발점을 연다.

함련에서는 이러한 관찰의 원리를 자연 현상을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맑은 물도 깊어지면 검게 보이고, 누런 산도 멀어지면 푸르게 보인다는 표현은, 사물의 본질이 변화한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위치와 거리, 조건에 따라 인식이 달라짐을 나타낸다. 이를 통해 시인은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인식이 결코 절대적일 수 없음을 암시한다.

경련에서는 자연에서 발견한 이치를 인간 사회와 도덕의 문제로 확장한다. 지위가 높으면 위엄이 저절로 무거워지고, 집이 비록 누추하더라도 덕이 있으면 그 향기는 더욱 짙어진다는 구절은, 진정한 가치와 존엄이 외적 조건이 아니라 내적 덕성에서 비롯된다는 가치관을 드러낸다. 이는 앞선 자연 관찰이 인간의 도덕적 성찰로 이어지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미련에서는 시인의 삶의 태도와 정신적 경지가 드러난다. 늙은 시인은 이미 말을 잊은 지 오래되었고, 작은 뜰에는 이끼 자국만 가득하다는 묘사는, 세속의 말과 번잡한 생활에서 벗어나 고요한 관조의 삶에 이른 시인의 상태를 보여 준다. 이는 사물을 관찰하며 이치를 깨닫는 과정 속에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는 곳에서 은거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 시는 사물과 자연에 대한 관찰에서 출발하여 인식의 상대성을 깨닫고, 이를 인간의 도덕과 삶의 태도로 확장한 뒤, 관조와 침묵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차분하게 그려 낸 작품이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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