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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구름 기린 Oct 04. 2019

3.혼술

소주잔에 채워진 팔부의 매력

소주잔에 말갛게 팔부 정도를 채우면 딱 좋다.


머리가 쨍하게 차가운 팔부 한잔은 원샷이 부담스럽고

두 번 또는 두 번 하고 3분지 1모금 정도로 넘길 수 있는

모자르지도 넘치지도 않는 높이.


종일 배곯았던 흥부처럼

마음을 채우지 못하고 꿔다 쓰기만 한 날이나

하루 동안 힘 쓰고 몸 쓰며 먼지구덩이 속에서 일해 매우 고단한 날


퇴근해 단골 식당 구석에서 싸한 액체를 목 안으로 넘기고

따끈한 국물을 한 수저 넘겨 그 뒤를 따르면

온종일 버티기 위해 하루 먹고 마시고 뱉은 내게

처음으로 온전히 마음을 써 나를 위해 한 일이 된다.


어느샌가 소주가 일이 아닌 혼자만의 레저가 되었다.


이전에는 회사에서 타이를 끄르고 나서면

맥주를 찾지 소주를 나서서 주문한 적이 없었다.

쓰고. 희석된 알코올 향은 넘기는 일은

맛있지도 즐겁지도 않았다.

그저 소주는 회사일과 관계를 위해서만 꺼내 드는

일의 연장 같은 무엇이라고만 생각했다.


입사하고 회사에서 두 번째 이사를 하던 그때,

멋모르고 몸으로만 때웠던 첫 번째 이동보다 아니까 몸과 맘이 더 고단했던 때

퇴근 후 해장국집에서 멍하니 있다 소주 한 병을 시켜 넘기기 시작했다.


고된 하루후에 시작한 사적인 소주가

컨디션에 따라서 반 병, 3분지 2병을 오가다가

지금은 평일 저녁 김치찌개와 라면사리에 한 병을 꿀떡 삼켜버린다.


단순히 즐거움이나 술에 대한 애정이 아닌,

그날에 나를 조용히 삼키면서 정리하는 의식과 같은 느낌.


나불나불 하루를 털어내 들려줄 사람도

즐거운 이야기도 없는 평범한 날에,

그저 조용히 단골집 몇 곳의 한 구석 테이블에서

유튜브 영상 귀에 달고 쨍하니 시린 소주를 입에 한번 머금다가 삼키는

 

그날의 나를 위해 행한 레저이자 

하루를 버텼음을 자축하는 안식.


https://youtu.be/jlHJRTR9 Qi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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