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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구름 기린 Sep 02. 2020

관찰일기

만 37세 생명체 보고

  그녀는 만 37세의 생명체. 어느 여름날 생글거리는 동그란 눈과 마스크 쓴 얼굴로 약속시간을 늦어가며 내게 와 초면에 자몽 소주를 제조하며 닭발을 씹었다. 심지어 만난 첫날 녹색 팩을 쓰고 잠드는 모습을 보여준 특이한 존재. 처음 본 그날 깨닫지 못했으나 텍스트로 적어놓으니 우리의 첫 만남은 어쩌면 그로테스크한 듯하다.


  우리가 처음 마주했던 각자의 모습은 아마 각자의 일기 속에 있을 것이다. 일기 속 그녀는 단단하고 마른 바삭함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그녀는 나를 까칠함이 있는 사람으로 인식했다고 했다. 그녀의 실제 모습은 잘 웃고 흥이 있으며, 놀려도 쉽게 화내지 않는 여유가 있다. (나는 그녀에게 빙구로 불린다.)


 그녀는 자기를 커피 중독이라 말한다. 아마 하루에 7~8잔도 먹는 듯하다. 그녀의 커피사랑을 듣고 있으면 마치 그녀 등에 커피 게이지가 그려져 있고 카페인이 감소할 때마다 게이지가 한 칸씩 내려가는 로봇이 상상된다. 근로의욕과 카페인의 상관관계. 커피를 쫍쫍 마시며 게이지가 채워지는 모습을 상상하면 이건 좀 귀엽다고 느낀다.


 그녀는 잠을 많이 자진 않는다. 늦은 시간까지 깨어있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운동을 간다. 노인네 같다고

놀려도, 가끔 같이 있을 때 오래 잤으면 해서 이불을 덮어주거나 등을 쓸어줘도 그다지 많이 잠을 자지는 않는다. 일하다 흥이 나면 밤을 새기도 하는 것도 같다. 놀러 가서도 밤 12시를 기점으로 급격하게 생체 퓨즈가 꺼지던 나와는 다른 부분이다.


 그녀의 거주지는 내가 인생에서 한번밖에 가보지 못한 곳. 보내준 사진에는 엑스칼리버가 꽂혀있을 것 같은 구름 같은 안개와 숲이 둘러진 곳처럼 나와있다. 어쩌면 그녀와 잘 어울리는, 여유로운 분위기의 도시. 하지만 그녀는 무려 도시 토박이. 그녀는 도시를 버리고 배산임수를 택한 여자. 다음 만남에는 'L 로드'를 선물해보면 어떨까 생각이 든다.


 그녀는 잘 웃는다. 실없이 던지는 말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잘 웃어준다. 그녀의 반응에 나는 재능을 다해 가벼운 얘기들을 뽑아낸다. 그 과정 속에서 그녀와 나는 수많은 별명들이 붙여졌다 사라진다. 누가바,

싼마이, 삐꾸, 둘만 아는 의미의 가벼운 호칭들이 그날그날 장난처럼 붙여졌다가 사라지는 과정. 하루하루 쌓이는 가벼운 시간들이 즐겁고 아쉬운 기분이다.


 그녀는 노래 부르는 것을 사랑한다. 소리를 시원하게 뽑지는 않지만 음감이 정확하고 무리하려 하지 않아서 듣기에 나쁘지 않다. 가끔은 혼자 가사도 쓰고, 짧은 손가락으로 기타도 쳤었다고 했다. 회사에 노래방 기기를 놓았고, 기계의 최초 목적은 복리후생이었으되, 현재는 그녀의 사적 취향을 충족시키는 데에 많이 쓰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내게 자극과 감정을 가져온다. 마르고 버석거렸던 내 시선은 하루하루 다 기억하지 못할 우리의 별명과 사건 / 사소함들이 눈길 위 사슴 발자국처럼 총총이 남겨져 가면서 물기를 머금는다. 그녀의 존재는 천천히 내 마른 시선과 감정을 깨운다.  


  나는 우리의 큰 의미 없는 사소함을 좋아한다. 삼십여 년을 서로의 존재 없이 지내온 두 존재들이 만드는 사소함.  언젠가 그 사소함이 큰 의미가 되어있을 것이라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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