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하루

그래서 다시 떠오르는 내일의 태양

by realnorth

어렴풋한 잠에서 깨어난 것은 시계가 새벽 여섯시 즈음을 달리고 있을 때였다. 희미한 이성을 붙들고 침대 위에 한참을 앉아 있었지만, 어젯밤의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꿈 속 등장 인물들은 실체가 분명치 않았다.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 같기도 했고, 생전 모르는 사람인것 같기도 했다. 그들은 종종 일관되지 못한 말과 행동을 이어나갔으며, 나는 그들의 말과 행동 앞에서 뚜렷한 의견을 피력하지 못한 채 상황에 끌려다니고 있었다.


봄의 새벽은 모호하기만 한 어젯밤의 꿈처럼, 어느샌가 침대 밑으로 다가와 내 머리칼을 간지렀다. 햇살이 조금씩 밀려 들더니, 방안에 길고 느린 빛의 기둥을 만들어냈다. 그 빛의 기둥에서 방안에 부유하고 있던 작은 먼지들이 어서 빨리 출근을 준비하라는 듯이 바쁘게 움직여댔다. 현실이 꿈보다 더 또렷하고 분명한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내 현실이 어젯밤 꿈보다 더 또렷하고 분명한 것이라 고 선언하는 것이 내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꽝이라고 적힌 복권 몇 장을 접어서 하늘로 날려보았자, 그 종이비행기는 그리 멀리 날아가지 않는다. 다만 그 종이비행기 는 잠시간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는 듯 하다가, 운명처럼 추락할 뿐이다.


간지러운 5월의 아침 햇살은, 문틈을 비집고 들어선 일련의 소음에 혼비백산하여 후퇴했다. 부엌에서는 어머니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릇들은 저들끼리 맞부딧히며, 이제 조금만 더 지체했다간 회사에 지각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보내왔다.

나의 생각들은 대부분, 바다 위에 떠 있는 부표와도 같다. 그 깊이와 너비를 알 수 없기에 공허하기 짝이 바다 위에 바람이 부는대로 출렁이는 부표처럼. 나의 생각들은 대부분, 그 부표처럼 갈곳을 잃은 채, 이런 저런 갈등에 나부끼는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아침 식사는 그 런 나로 하여금 잠시나마 현실을 떠올리게 만든다. "얘야. 오늘 하루도 시작되었단다. 오늘이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그런 오늘이더라도 어제 같은 내일을 살지는 않아야 하는 법이란다." 아침식사로 식탁에 올라온 고등어가 생기 없는 눈을 껌뻑이며, 어머니의 말씀을 전해왔다.


"아차. 오늘은 연주회를 가는 날이었지" 나는 문득 고등어구이 한 점을 집어먹다가 오늘 오후의 연주회 관람 일정을 떠올렸다. 연주회에 늦지 않게 도착하려면, 오늘은 부지런히 일해야 할 참이었다. 한낮의 열기는 쏜살같이 지나갔다. 달리는 열차의 커다란 울음으로도 위로받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새벽의 공허는 저녁이 되어서야 연주될 참이었다.


이번 연주회는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라는 피아노 연주자가 참여했다. 이화 오케스트라와 꿀띠쉐프의 협연으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이 연주된다고 했다. 나는 제법 클래식을 즐기는 편이지만, 평소 오래된 음원만을 들어왔기 때문 에, 현대 음악가는 잘 알지 못했다. 죽은 자들의 연주만을 들어오던 내게, 꿀띠쉐프라는 사람은 그 이름만큼이나 생소했다. 오늘 함께 연주회에 가기로 한 친구는, 꿀띠쉐프가 제법 대단한 실력을 갖춘 연주가라며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꿀띠쉐프는 정말 대단한 연주를 보여줬다. 협연한 이화 오케스트라가 꿀띠쉐프의 연주를 받쳐주지 못하는 것 같은 인상까지 받았을 정도였다. 꿀띠쉐프는 기술적 완벽을 넘어, 열정이 가득한 연주로 객석의 갈채를 받았다. 이번 연주회는 꿀띠쉐프의 독보적인 실력에 힘입어 나름대로의 만족감을 주었지만, 어딘가 조화롭지는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이든 연습이 중요한 법이지만, 해외 유명 연주자와 국내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은 촉박한 일정 때문에 연습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아마도 그들은 충분히 호흡을 맞춰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비례와 균형을 통해 완성되는 일련의 조화로움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연주자들 개개인의 기술적 완벽성은 훌륭한 연주회를 위한 선제조건이며, 그것들의 조화로운 운용은 아름다운 음악이 되기 위한 마지막 노력이다.


나는 오늘 혼란스러웠던 새벽녘의 꿈이 내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채 이해하지도 못한채 하루를 시작해야 했 다. 내가 미처 끝맺지 못한 새벽의 꿈처럼, 그들도 오늘의 연주회를 미처 끝맺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각자의 일을 끝맺지 못했기 때문에, 내일도 오늘과 같은 태양을 한번 더 맞이해야 한다. 우리들의 일상은 이렇게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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