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서서히 안거 준비를 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씩 글을 통해 알리고 있다. 걷기 동호회 밴드 모임에서는 사람들이 이미 글을 읽어서 알고 있는 거 같다. 한 친구는 안거 전에 한번 보자고 연락을 해오기도 했다. 안거 전에 미리 몸과 마음을 어느 정도 차분하게 만들 필요도 있다. 오늘 아침에 6시경 기상해서 한 시간 좌복에 앉아 호흡명상을 했다. 보통 50분 명상을 하는데 이번 안거 기간에는 한 시간 동안 하기로 결정했다. 명상의 주제는 사라지고 길에 대한 생각과 쓸데없는 잡념만 가득하다. 그래도 한 시간 동안 같은 자세를 유지하며 호흡을 찾으려 노력했다. 호흡과 잡념은 끊임없이 반복해서 나타났다 사라진다. 명상 마친 후 스트레칭과 근력운동을 했다. 근력운동으로는 푸시업 40회와 스쾃 50회를 했는데, 매월 10회씩 늘려나갈 계획이다. 안거 끝나는 시점이 되면 각각 70회와 80회 정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걷는 것은 습관이 되었지만 근력 운동은 몸에 익지 않아 자꾸 안 하게 된다. 하지만 요즘 서서히 몸에 익히고 있고 이미 2주 정도 매일 하고 있으니 계획한 목표는 달성할 수 있을 것 같다.
명상과 운동을 마치고 나니 오전 7시 40분이다. 아침 식사를 8시경 한다. 아침 식사 후 신문을 보고, 책상에 앉아 9시부터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을 쓴 후 수정하고, sns에 업로드를 모두 마치면 12시 경이된다. 오전 루틴은 어느 정도 기초가 다져진 것 같다. 점심 식사 후 걸으러 나가서 한 시간 이상 걷고 돌아온다. 걸은 후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오후 4시 경이된다. 잠시 낮잠을 30분 정도 잘 때도 있고, 아니면 TV를 보며 휴식을 취하거나 책을 읽기도 한다. 6시경 저녁 식사를 하고 뉴스를 본 후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본 후 11시경 취침한다. 하루 일정은 대충 이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딸네 머무는 날과 외부 일정이 있는 날은 어쩔 수 없이 이 루틴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그냥 유연하고 편안하게 주어진 하루를 살아가면 된다.
이번 안거 기간 동안 규칙을 정할 필요가 있다. 이것저것 생각한 후에 가장 단순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명상 한 시간, 스트레칭과 근력운동, 걷기 한 시간 이상, 안거(걷기) 일기 쓰기, 이 네 가지를 지키는 것이 안거 기간 동안 할 일이다. 시간을 정하지는 않고 상황에 맞춰 편안한 시간에 하기로 했다. 딸네 머물 때도 있고, 면접 위원으로 외출할 때도 있고, 화상 개인 상담을 한 케이스 진행하고 있으니,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대처하기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어쩌다 할 수 없는 날은 편안하게 넘어갈 생각이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정리해 보았다. 개인적인 모임, 음주, 영화, 이 세 가지를 안 하기로 했다. 걷기 모임인 밴드 활동 외의 사적인 모임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금주는 안거 기간 동안 당연히 지켜야 할 계율이다. TV를 튼 후 볼 것이 없을 경우 killing time 용으로 아무 생각 없이 영화를 보는 경우가 많아서 이 습관의 고리를 끊어내고 싶다.
이 외에 한 가지 더 할 일이 있다. 지금도 계속 진행하고 있는 일로 안거 시작 전에는 끝날 수 없어서 안거 기간 동안 계속 이어서 할 생각이다. ‘마음챙김 걷기’ 책 발간 작업이다. 지금도 원고 수정 작업을 하고는 있지만, 자꾸 작업이 끊겨서 속도가 붙지 않는다. 약 70여 편의 글이 초고 상태로 남아있다. 원고 수정 후 목차를 결정하고, 불필요한 원고는 솎아 내고, 출간 계획서와 샘플 원고, 그리고 원고 전체를 정리해서 출판사 여러 곳에 발송할 계획이다. 만약 출간할 출판사가 없다면 사비를 들여서라도 출간할 계획이다. 이 모든 작업을 마치는 데 앞으로 최소한 두세 달 정도는 걸릴 것 같다. 동안거 해제와 함께 회향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책 작업은 앞으로 걷기 학교를 운영하는데 근간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작업이다. 그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며 살아왔다. 그간 배웠던 또 꾸준히 해왔던 불교 공부, 명상, 걷기, 심리상담, 글쓰기 등이 모두 걷기 학교로 귀결된다. 그런 면에서 이번 안거는 나름 꽤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함께 걸으며 배우고, 혼자 걸으며 성찰하고, 안거를 통해 마음 밭을 다스리며 이 일을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며 살고 싶다.
“수행하는 이는 아상을 통해 아상을 놓아 아상에 머무르지 않을 뿐, 아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중략) 아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머무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생명과학과 선, 우희종)
요즘 읽고 있는 책 <생명과학과 선>을 읽다가 위의 문구를 읽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동안거 내내 또 앞으로 평생 마음에 담아두어야 할 귀한 말씀이다. 또한 무아라는 말을 이해하기에 아주 적합한 문구다. 무아는 ‘나’가 없다는 의미로 즉 ‘나’라는 상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뜻한다. ‘나’라는 몸을 지니고 있고, ‘나’라는 놈이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찌 ‘나’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즉 에고(ego)를 의미한다. 무아는 ‘나’를 버려서 ‘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나’라는 에고에 머물지 말라는 의미다. 금강경에 나오는 경구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은 바로 에고에 머물지 않는 마음을 내라는 의미다. ‘나’라는 에고를 통해서 ‘나’라는 에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에고가 작동할 때 지금 작동하고 있는 놈이 나의 본래면목, 본성, 불성이 아니고 에고라는 놈이 작동한다고 빨리 알아차리면 에고는 사라진다. 에고에 머물면 머물수록 에고의 힘이 강해져서 쉽게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싹이 자라기 전에 뿌리를 뽑아야 쉽게 뽑을 수 있다.
거울 위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쓴다. 지우면 바로 사라지고 원래 바탕인 거울이 드러난다. 하지만 우리는 거울은 잊고 그 위에 쓰고 그린 그림과 글씨만을 보며 그것들이 거울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멋진 집 그림을 그리고,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을 그린다. 멋진 글귀를 쓰고 읽으며 그 말이 자신의 말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글과 그림이 바뀌는 반복적인 작업을 계속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글과 그림이 자신이 되어간다. 죽을 때가 되어야 비로소 글과 그림을 지우고 원래 바탕인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늙은 얼굴을 들여다본다. 하지만 그 얼굴 역시 본래 모습이 아니다. 자신의 모습은 맞지만, 그 모습이 자신의 본래면목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자신의 본래면목을 보지도 못한 채 눈을 감는다. 거울 위에 아무리 멋진 그림과 글을 써도 물에 그리고 쓴 것과 다르지 않다. 무의미한 짓이다.
거울은 비추는 것을 단지 비출 뿐이다. 구름이 보이면 구름을 비추고, 빵이 나타나면 빵을 비춘다. 거울은 계속해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모습, 즉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비춘다. 하지만 거울에는 그 모습들의 자취조차 남아있지 않다. 그냥 나타날 때 잠시 비추고, 사라지면 다시 본바탕으로 돌아온다. 거울은 집착할 대상 자체가 없다. 그냥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다. 우리는 비추는 상을 쫓는다. 그리고 원하는 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화를 내거나 자신을 괴롭힌다. 상을 쫓을 필요가 없다. 바탕을 찾고 보아야 한다. 근데 이 본바탕은 늘 우리 자신과 같이 있다. 다만, 우리가 그 사실을 잊고 살았을 뿐이다. 늘 자신과 함께 있는 거울을 찾아 한평생 방황하며 살아간다. 보물이 자신이 보물인 줄도 모른 채 보물을 찾아 온 세상을 헤매며 살아간다. 참 우습고 어리석은 모습이지만, 우리네 모습은 실은 이와 같다.
이제 눈 뜬 장님에서 눈먼 눈 밝은 이가 되어야 한다. 눈을 뜨고 있지만 본바탕을 볼 수 없으니 장님이다. 거울에 보이는 상에 집착하지 않으니 상이 보이지 않는 장님이 되고, 상에 집착하지 않으니 본바탕을 보는 눈 밝은 이가 된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은 걷고의 걷기 학교 교장이 마음에 깊이 각인해야 할 말씀이다. 아상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아상에 머물지 않는 연습이 동안거의 주제가 되고 이 수행은 평생 해 나가야만 하는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