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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Jun 05. 2024

마음챙김의 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손녀 보윤이가 울기 시작한다. 안아주며 왜 우느냐고 물었다.

“영어 학원 가기 싫어”

“영어가 싫어?”

“아니, 그냥 가는 게 싫어.”

“엄마랑 잘 얘기해 봐”

“응”

아침 식사 후 걸으러 나가면서 현관에서 딸에게 얘기한다.

“애가 싫어하는데 계속해서 영어 공부 시킬 거야? 그러다 영어를 아예 싫어할까 걱정이다.”

“네 계속 시킬 거예요.”


더 이상 아무 말도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딸 얘기를 듣고 나오며 마음이 상했다. 처음에는 보윤이가 우는 게 안쓰러웠다. 그다음에는 나의 얘기에 딸이 전혀 주저하지 않고 단호하게 “네, 시킬 거예요.”라는 말이 서운했다. 딸네 집에 일주일에 며칠씩 머물며 필요한 일을 도와주기 시작한 것이 2년이 지나간다. 그간 손주 교육이나 양육 방식에 관해 아무런 얘기를 하지도 않았다. 주 양육자가 부모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인식시켜 주는 것이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딸 부부가 먼저 질문해 오거나 상의를 할 때에는 의견을 얘기하지만, 그러기 전에는 절대 먼저 나서서 얘기하지 않는 편이다.


집을 나와 걸으면서 발의 감각에 집중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고 딸에 대한 서운한 마음만 올라온다. 서운한 마음은 곧 가벼운 화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간 도움을 주었던 생각도 떠오르고, 아빠의 의견을 재고의 가치도 없이 잘라버리는 딸이 미워지고 괘씸하게 느껴진다. 다시 발의 감각에 집중하려 노력하지만 이미 올라온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발의 감각과 감정의 반복이다. 마음챙김 덕분에 화가 번지는 것을 막을 수는 있지만, 이미 일어난 감정을 가라앉히는 데 시간이 걸린다. 생각의 변화를 살펴본다. 손녀에 대한 안쓰러움에서 나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은 서운함, 그리고 서운함은 화로 번지고, 화는 딸이 괘씸하고 밉다는 감정으로 변해간다. 원래 의도는 손녀가 싫어하는 것을 시키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나중에 화가 나는 지점은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의 의견이 묵살된 것에 대한 화로 변해있다.


석촌 호수 주변을 걷는다.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하기 위해 걷거나 뛰고 있다. 그 안에서 나는 홀로 발의 감각에 집중하며 천천히 걷는다. 호수까지 20분 정도 걸어가는 중에 이미 감정은 많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감정의 변화를 살펴보며 겸연쩍은 웃음을 짓는다.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화 나는 지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나의 의견이 무시되거나 받아들이지 않을 때 화를 낸다. 딸이 자신의 생각을 확고하게 밝힌 것인데, 왜 나는 서운하고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돌이켜보니 가족 간에 또는 친구 간에도 그랬다. 남이 나의 의견에 반대하거나 나를 통제하려 하면 화를 낸다. 그러면서 나의 의견이 남에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고, 나의 방식으로 남을 통제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남의 통제는 받기 싫어하면서 동시에 남을 통제하려고 한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이 싫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사실을 잘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행동한다. 이율배반적이다.


다시 발의 감각에 집중하며 걷기 시작한다. 생각에 몰두한 나머지 호수의 어느 지점에 와 있다는 사실도 잊고 걷는다. 마음을 챙기고 걷지 못하고 있다. 주변을 살펴본 후 다시 마음을 챙기며 걷는다. 발의 감각이 예전보다 더 많이 느껴진다. 신발이 발을 감싸는 따뜻함도 있고, 충만감도 있고, 안정감도 느껴진다. 손가락의 감각이 마치 풍선에 바람이 분 것처럼 커지는 느낌도 든다. 손가락이 커지는 것을 느끼는 만큼 손가락의 감각은 강해진다. 예전에도 그랬다. 집중이 잘 되면 손이 커지는 느낌이나 손가락 끝 부분이 확장되는 느낌이 들었다.


한 가지 생각이 갑자기 떠오른다. 지금 걷는 발걸음이 이 생의 마지막 발걸음이라면 나는 어떻게 걸을까? 무슨 생각을 하며 걸을까? 아니면 발걸음에 온 집중을 하며 땅과 발의 감각과 자연을 느끼며 걸을까? 산티아고에서 만난 두 분이 기억난다. 한 분은 80대로 보이고, 그 뒤를 말없이 따르는 60대. 아마 부자지간인 것 같다. 노인은 비록 힘은 없어 보이지만 한 걸음 한 걸음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걷고 있다. 마치 지금 걷는 한 걸음이 이 생의 마지막 걸음인 것처럼. 그 발걸음은 엄숙하다. 감히 말을 붙이기조차 조심스럽다. 왜 오셔서 걷는지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그 노인의 걷는 모습이 떠오르며 지금 내딛는 발걸음이 마지막 걸음이라면 어떻게 걸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한 걸음에 나의 생명을 걸고 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발의 감각에 온전히 집중하며 이 걸음이 나의 마지막 걸음이라는 생각을 하며 걷기 시작한다. 조금 걸으니 발의 감각이 무겁게 느껴진다. 발걸음이 무거운 것이 아니다. 그 무거움은 안정감이다. 나의 발걸음이 마치 큰 산이 떡 버티고 서있는 느낌이 든다. 비록 잠시지만 무거운 안정감을 느끼며 걷는다. 발걸음은 가벼운데 느낌은 무겁다. 안정된 발걸음으로 석촌 호수를 한 바퀴 더 돈다. 마음의 구름은 사라졌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베토벤의 합창을 듣는다. 발걸음이 가볍다.


집에 돌아오니 딸이 반갑게 맞이한다. 나도 아무 일 없었던 듯 편하게 대하며 씻은 후 바디스켄을 하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오늘 감정의 흐름을 살펴본다. 웃음이 난다. 아무 일도 아니다. 다만 감정이라는 놈이 나를 갖고 놀았다. 나는 나대로, 딸은 때대로, 손녀는 손녀대로 마치 아무 일도 없듯이 지낸다. 실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손녀는 울었고, 나는 안아주었다. 나는 물었고, 딸은 대답했다. 그것이 전부다. 말은 말이기에 듣기만 하면 되는데 나의 감정을 실어버린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손녀는 영어 학원 가는 날 아침마다 운다. 그리고 다녀오면 아무 일도 없듯이 재미있었다고 한다. 그냥 집을 떠나 엄마랑 헤어지는 것이 싫은 것 같다. 영어 학원 다녀온 후에는 학원에서 스티커를 받았다고 자랑하며 보여준다. 나는 ‘최고’라고 얘기하며 안아준다. 아무 일도 없다. 또 사건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다. 어쩌면 우리네 삶도 이와 같을 것이다. 아무 일도 아닌 일에 감정을 내세우고, 내가 옳고 너는 그르다며 시비를 가리기 위해 시간과 감정과 에너지를 낭비한다. 참 쓸데없는 짓이다. 마음을 잘 챙기면 이런 불필요하고 쓸데없는 일로 인해 소모되는 시간과 에너지를 줄이며 살 수 있다. 그만큼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 마음챙김의 힘은 키우면 키울수록 우리네 삶을 풍요롭고 온전하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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