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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Jul 15. 2024

콤플렉스와 유식(唯識)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콤플렉스는 무의식에 있는 에너지의 덩어리이고, 역사적 사건들로 가득하고, 반복을 통해 강화되고, 우리의 인격의 한 부분을 보여주었으며, 프로그램처럼 입력된 반응과 기대를 맹목적으로 일으킨다.”라고 했다. 제임스 홀딩스라는 임상심리학자는 “콤플렉스는 무의식이 자극을 받을 때 일어난다. 패턴들은 그 자체의 생명력을 갖고 있으며, 우리를 넓은 미래가 아닌 편협한 과거에 얽매이도록 만든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 모두 무의식에 갇혀있는 콤플렉스가 우리의 삶에 영향을 크게 미치고 있으며,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한다고 강조한다. 콤플렉스의 영향으로 삶 속에서 어떤 자극을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자동적으로 반응을 하게 된다. 그런 반응들은 강화되며 점점 더 강력한 씨앗으로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다가 더 큰 힘으로 우리의 반응 즉 생각과 태도를 결정한다. 즉 과거의 경험과 그 경험으로 인해 만들어진 의식이 현재를 통제하고 있고 동시에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다.      


눈앞의 현상, 즉 대상을 의식하는 구조를 밝히는 학문을 현상학이라고 한다. 인간 중심 상담의 창시자인 칼 로저스는 개개인의 현상학적 관점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알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은 내가 현재 지각하고 경험하는 대로의 세계이다. 당신이 알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은 당신이 현재 지각하고 경험하는 대로의 세계이다. 그리고 확실한 것 하나는 그렇게 지각된 현실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현실 세계’는 사람 수만큼이나 많다.” 같은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서로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는 얘기다. 같은 경험을 해도 그 경험에 대한 느낌과 감정과 생각이 각각 다르다. 이런 사실은 삶의 고통을 만들어낸다.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주된 이유는 매우 사소한 의견 차이에서 발생한다. 그 의견의 이면에는 상황과 사람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각차이가 존재한다. 자신의 시각이 옳고 상대방의 시각은 그르다는 이분법적 사고가 갈등을 배가시킨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과연 실상(reality)은 존재할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우리가 보고 느끼고 만지고 냄새 맡고 있는 모든 것이 과연 실재(實在)일까? 만약 실재한다면, 같은 물건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점이 모두 같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실상의 모습은 칼 로저스가 얘기했듯이 사람마다 다르다. 동일한 세상에 대해 각자 다른 세상으로 인식하고 얘기를 하니 참다운 소통이 이루어지기가 어렵다. 또한 동일한 사람과 상황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모두 다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성장하고 배워나간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경험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의식이 우리를 통제한다. 그리고 다시 이런 통제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며 살아간다. 고통스러운 윤회의 반복이다. 우리 속에 들어있는 무의식, 콤플렉스, 아뢰야식,  아니면 뭐라 칭하던, 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각자가 자신의 주인인데, 주인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놈들이 우리를 통제하고 지시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무척 당황스럽다.     


불교에 유식학(唯識學)이라는 학문이 있다. 정승석은 그의 저서 ‘유식에서 상식으로’에서 “유식론은 단순히 대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 과정을 설명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해 그 진상을 밝히는 존재론이다. 유식학은 기억이 잠복했다가 표출하기를 반복하는 두 가지 기능을 면밀히 고찰하여 세상의 모든 것이 마음의 작용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밝혀나간다.”라고 기술했다. 즉 유식학은 불교의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의 원리와 만법의 실상을 밝히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실상은 단지 의식 속에 존재한다. 함께 같은 길을 걸어도 어떤 사람은 길에서 들리는 새소리를 듣고, 어떤 사람은 꽃을 보고, 어떤 사람은 향기를 맡는다. 이 세 사람이 걷기를 마친 후 느낀 점을 얘기한다면 각자 다른 얘기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틀림없이 같은 길을 걸었는데 보고 느낀 점은 다르다. 눈이 있지만, 눈이 물체를 보기 위해서는 의식이 함께 존재해야 한다. 세상은 하나다. 하지만 세상을 보는 또는 느끼고 인식하는 세상은 사람 수만큼 많다. 어떤 의식을 갖고 세상과 경험을 하고 느끼느냐에 따라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 따라서 각자 보는 또는 인식하는 세상은 자신이 만들어 낸 세상에 불과할 뿐이다.    

  

정신분석은 무의식 내에 잠재해 있는 콤플렉스를 의식화하여 외부 세상을 왜곡되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는 심리치료기법이다. 현상학은 우리가 지각하고 있는 세상이 주관적인 것이므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로 삶을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식학은 모든 존재는 개념과 표상으로 이루어진 허상이므로, 허상의 실체를 바로 볼 수 있는 바른 견해 (正見), 즉 바른 시각을 갖고 세상을 보라고 가르친다. 무의식이나, 현상학적 세계, 그리고 유식은 모두 공통점이 있다. 존재의 실상은 존재하지 않고, 우리의 과거 경험과 사고로 만들어진 개념화된 세상, 즉 허상(虛像)만 존재한다는 점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외부 자극이나 상황을 각자 다르게 판단하고 느낀다. 따라서 실재는 없고, 우리가 실재라고 인식한 세상만 있는 것이다. 허상만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무의식 속 콤플렉스나 스스로 개념화한 관점이 만들어 낸 왜곡된 시각, 즉 바르지 못한 시각으로 세상과 사람들과 상황을 바라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바로 이 부분이 우리가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왜곡된 시각을 정견으로 바꿀 수 있다면, 우리의 고통을 평온함으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볼 수 있다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 우리의 고통은 우리가 만들어 낸 허상으로 인해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런 허상을 붙잡고 일희일비 (一喜一悲) 하는 모습의 어리석음을 보게 된다면, 저절로 그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다만 정견과 존재의 실상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한 반복적인 수행과 연습이 필요할 뿐이다.      
 

“명상은 감각 입력 데이터 하나하나를 모아 ‘의미 있는 자기’라는 거대 구조를 만들어 내는 작업을 내려놓고 마음이 쉴 수 있도록 피난처를 제공한다. 제대로 된 알아차림의 수행 안에서 우리는 의식의 에피소드 하나하나를 강력하게 알아차리지만, 그 즉시 그것들을 놓아 버리고 다음 순간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그 어떤 것도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통과해 간다. (중략) 순간순간 우리 내면에 심리적 현실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체계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면 현상에 대한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인 반응의 고리를 끊을 수도 있고, 나아가 깊이 뿌리내린 믿음을 바꾸는 가능성을 만들어 내고, 우리의 모든 경험을 망치는 보편적인 불만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액설 호퍼 외 지음, 프로이트의 의자와 붓다의 방석, 2018)     


사람의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어 주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도와줄 수 있는 여러 가지 방편들이 있다. 불교에서는 존재의 실상을 바르게 깨닫고 모든 세상의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는 방편으로 다양한 명상 수행법을 가르치고 있다. 각자 자신에 맞는 방법들을 찾아 노력을 하여 겉으로 드러난 허상에 속지 말고, 바른 시각으로 같은 세상을 지금과는 다르게 바라보며 삶 속에서 행복과 평온을 유지하며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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